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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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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

19486개의 내용이 있습니다.

번호 유형 제목 저자명 소장처 생산연도 조회
2902 고문헌 영중추부사 채제공(蔡濟恭)이 최소(崔熽)를 처분한 일로 차자를 올려 스스로 인책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8년 (1794) 12
2901 고문헌 사관을 보내 영돈녕부사 유언호(兪彥鎬)에게 전유하고 함께 오라고 명하고, 이어 다시 예관(禮官)을 보내 수의(收議)하라고 명하였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9년 (1795) 11
2900 고문헌 성정각(誠正閣)에서 이조 판서 윤시동을 소견하였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9년 (1795) 13
2899 고문헌 재전(齋殿)에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소견(召見)하였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9년 (1795) 13
2898 고문헌 탐라에서 올린 전최 계본(殿最啓本)을 열어 보았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9년 (1795) 14
2897 고문헌 대정현(大靜縣)에 정배(定配)한 죄인 양지온(梁之蘊)을 풀어 주었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9년 (1795) 11
2896 고문헌 제주 목사 이우현(李禹鉉)이 본도 3개 읍(邑)의 진휼을 마치고 급히 장계한 데 대해, 모환(麰還) 대신으로 거두는 양태(凉臺 갓양태)와 해곽(海藿 미역)은 장계에서 청한 대로 정퇴(停退)해 주고, 전에 내린 제주 목사를 시상하라는 전지는 삭제하며, 원납인(願納人)인 전 현감 고한록(高漢祿)은 대정 현감(大靜縣監)으로 특별히 차임하고 이어 군수의 이력(履歷)을 쓰게 하며, 홍삼필(洪三弼)과 양성범(梁聖範)은 순장(巡將)으로 올려 차출하라고 명하고, 이어 정리곡(整理穀)을 양태와 해곽으로 대신 징수하는 것은 일절 거론하지 말아서 모든 백성에게 자궁(慈宮)의 은혜가 널리 미친 바를 알게 하라고 명하였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9년 (1795) 15
2895 고문헌 전 정언 변경우(邊景祐)가 상소하여 제주(濟州)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를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려 도백과 목사를 시켜 이치를 따져 장계로 보고하게 하겠다고 하였다. 이어 제주목(濟州牧)은 3개 읍에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굶주려 죽은 자들을 제사 지내라고 명하였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9년 (1795) 12
2894 고문헌 각 해당 관사에 격쟁 원정(擊錚原情) 18도(度)를 판하(判下)하였다. 남옥(南玉)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고 한 일은 그대로 시행하고, 김성탁(金聖鐸)의 죄명은 용서하도록 하며, 이세풍(李世豐)과 정경달(丁景達)은 풀어 주고, 이지권(李之權)은 엄히 신칙하여 다시 번거롭게 호소하지 못하게 하고, 허복(許澓)의 원정은 시행하지 말고 처분을 기다릴 것이며, 이영(李榮)의 족보(族譜)에 대해서는 어영대장 이한풍(李漢豐)으로 하여금 상세히 조사하여 보고하게 하고, 박성휘(朴聖輝)에 대해서는 호조 판서 이시수로 하여금 판결해 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9년 (1795) 13
2893 고문헌 좌의정 유언호(兪彦鎬)의 열여섯 번째 정사(呈辭)에 대해,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19년 (1795) 9
2892 고문헌 작년 가을에 정퇴(停退)한 제주목(濟州牧)의 환자(還上)는 내년 가을까지 그대로 정퇴하고, 이전곡(移轉穀) 중 유작조(留作條)를 우심재(尤甚災)인 동리(洞里)는 보릿가을까지 전량을 정퇴하고 지차(之次)인 동리는 절반을, 초실(稍實)인 동리는 3분의 1을 역시 정퇴하고, 평역 군관(平役軍官)의 신역미(身役米)와 노비의 신공미(身貢米), 남정(男丁)의 대동미(大同米)는 절반을 정퇴하고, 시노비(寺奴婢)의 추쇄(推刷)는 내년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고, 군병의 조련은 우선 그대로 정지하고 노비 추쇄와 빚 징수는 내년 가을까지 막아 주라고 명하였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20년 (1796) 13
2891 고문헌 한성부가 탐라(耽羅)의 호구(戶口)와 백성 숫자를 올렸다.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정조20년 (1796)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