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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상창리 양씨가 고문서: 명문(경작지를 서로 교환한 증명서)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13. 明文(경작지를 서로 교환한 증명서)嘉慶陸年辛酉伍月初玖日梁國勛處相換明文. 右相換事段 家坐基皮牟壹斗付 及月羅岳東 大田員皮牟壹石付只 貸捧後 梁國哲處買得 是在 蟹穴員租種壹斗參升付 四標段東姜應赫 畓西買者畓南水洞北私奴永山田 四表分明是在 畓 庫乙 本文記幷以永永許給相換爲去乎 日後 若 有子孫族類中雜談(爭望)之弊是良置 持此文記 告 (官卞正)事. 畓主 叔父 梁庭弼 (수기)訂人 姪子 梁國兼 筆執 鎭撫 任師彦 (수기) 가경 6년 신유(순조 1년 1801) 5월 초9일 양국훈과 서로 바꾼 명문. 이 상환한 일은 집이 앉은 터의 겉보리 한 마지기와 월라악 동쪽 대전원(한밭 지경)에 있는 겉보리 한 섬지기를 대가로 받은 뒤에 양국철에게서 사들인 해혈원(해혈 지경)에 있는 볍씨 한말석되지기로 사방 경계표지는 동쪽에 강응혁의 논 서쪽에 매입한 사람의 논 남쪽에 수통 북쪽에 사노 영산의 밭이니 사방 표지가 분명한 논을 이 문기와 아울러 영영 주어 서로 교환하였거든 뒤에 만약 자손이나 가족 무리 중에서 잡담하거나 (다투려는) 폐단이 생기거든 이 문기를 가지고 (관청에 알려 바로잡을) 일이다. 논주인 숙부 양정필 (수기) 증인 조카 양국겸 쓴 사람 진무 임사언 (수기) *1행의 열째 글자는 王 변에 欠 자를 붙였다. 없는 글자다. 玖(아홉 구) 자를 쓴 것으로 본다. 열일곱째 글자는 扌(손 수) 변에 오른쪽의 위에는 臼(절구 구), 아래는 夊(천천히 걸을 쇠) 자를 받쳐 쓴 것으로 보인다. 문맥으로 유추하여 相換(상환)을 쓴 것으로 본다. 또 여섯째 줄에서 14-15-16번째의 어구는 ‘爲大等’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데, ‘爲去等(하거든⋅하였거든)’을 쓴 것으로 본다.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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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2019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5
첨부파일
13. SAM_658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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