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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한공천 유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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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공(恕齋公)의 학문(學問)과 유허지(遺墟地) 및 충의사(忠義祠)

 

서재공(恕齋公)은 풍운(風雲)이 위급(危急)을 고(告)하던 고려말(高麗末)에 관도(官途)에 나아가 벼슬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까지 이르렀고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기울어져 가는 고려(高麗)를 마지막까지 붙들고 여조재흥(麗朝再興)을 이룩하려 애쓰시다가 국파군망(國破君亡)하는 슬픔을 당(當)하게되자 오직 대의(大義)를 위(爲)하여 부귀영화(富貴榮華)를 헌신짝처럼 버리시고 제주(濟州)에 오시어 일생(一生)을 의(義)롭게 사시다 가신 어른이시다.

서재공(恕齋公)의 행동철학(行動哲學)은 호국사상(護國思想)과 대의정신(大義精神)이었다. 고려(高麗)가 망(亡)할 때 고려충신(高麗忠臣)들이 나라사랑하기를 지상(至上)으로 하고 대의(大義)를 위(爲)해서는 생명(生命)을 초개(草芥)처럼 했던 선비 기질(氣質)은 바로 우리 민족혼(民族魂)의 저류(低流)를 이룬 것으로 이러한 호국순절(護國殉節)의 정신(精神)이야말로 후세(後世)에 수(數)많은 국난(國難)을 이겨내는데 원천(源泉)이 되어왔다.

제주(濟州)에 도착(倒着)한 서재공(恕齋公)은 지금(至今)의 남제주군표선면가시리(南齊州郡表善面加時里)에 정착(定着)하였다. 이곳은 해안(海岸)에서 십여(十餘)키로나 들어간 한라산(漢拏山) 깊은 산(山)속이었고 인가(人家)도 없고 수목(樹木)만이 울창한 미개지(未開地)이였지만 이러한 심산유곡(深山幽谷)에 은세(隱世)하시어 천지자연(天地自然)을 벗으로 삼고 조제충성(鳥啼蟲聲)을 낙(樂)으로 하여 여생(餘生)을 마치시었다. 공(公)께서 높은 학식(學識)과 특출(特出)하신 인품(人品)을 지니셨기에 인근(隣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배움을 청하였고 따라서 하나의 부락(部落)이 설촌(設村)되었다고 전(傳해)지고 있다. 오늘날 표선면 가시리(表善面 加時里)는 가장 개발(開發)이 잘된 대부락(大部落)을 이루고 있어서 산천(山川)이 아름답고 인심(人心)이 좋은 곳으로 유명(有名)하다. 지금(至今)도 이곳에는 서재공(恕齋公)이 여생(餘生)을 사시다 가신 유허(遺墟)가 남아있어서 학당(學堂)터, 사장(射場)터, 점당(點堂)터 등(等), 지명(地名)이 전(傳)해오고 있다. 

 

출처:『청주한씨대동족보』 상권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18
첨부파일
서재한 공천 유허지 (2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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