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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공 고조기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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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대 성주 고조기 공 행장

 

1088년(宣宗 5 代辰)~1157년(毅宗 11 丁丑), 고려 초기의 문인(門下侍中平章事). 처음 이름은 당유(唐愈), 호는 계림(鷄林), 시호는 문경(文敬), 성주 우복야(右僕射) 유(維)의 아들로 1088년(宣宗 5 代辰)에 출생하였으며, 성주작을 물려받았다.

공은 문헌공도(文憲公徒)로서,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崔沖)이 개설한 사숙구재학사(私塾九齋學舍)에서 수학하고, 1107년(睿宗 2 丁亥)에 약관 19세로 한즉유(韓卽由)의 방(榜)에 문과 급제하여 남쪽지방으로 벼슬길에 나가 청백봉공(淸白奉公)하고 경사(經史)를 섭렵하는 등 학문에 통달하며 출중하니 벼슬이 시어사(侍御史)에 오르게 되었다.

공은 성품이 강개(慷慨)하여 잘못된 일이 있으면 윗사람이라도 주저없이 간(諫) 하였으니 1129년(仁宗 7 己酉)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인 문공원(文公元)과 함께 시국의 폐단을 상소하였다가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 예부랑중(禮部郎中)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1147년(毅宗 1 丁卯)에 의종(毅宗)이 즉위하면서 공은 다시 중신(重臣)에 등용되어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 정당문학참지정사(政堂文學參知政事)가 되었으며 다음해 8월에는 지공거(知貢擧)로서 진사(進士) 시험의 시관이 되어 유정견(柳廷堅) 등 25명에게 급제를 주었다.

1149년(毅宗 2 己巳) 4월에 공원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의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고, 그 해 7월에는 왕이 청연각(淸燕閣)에서 베푼 잔치에 공은 어사중승(御史中丞)인 고영부(高瑩夫), 보문각직각(寶文閣直閣)인 문공유(文公裕) 등과 함께 참석하였다.

왕은 탐라성주인 공과 군신(君臣)의 예의를 생략하고 자주 만나 국사(國事)와 탐라의 정사(政事)를 논의하고 서루(西樓)에서 격구(擊毬)를 관람하기도 하였다.

그 후 1151년(毅宗 5 辛未) 3월 공은 중군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 겸 서북면 병마판사(西北面兵馬判事)에 임명되는 등 문무(文武)를 겸비함으로써 많은 전공과 업적을 남겼다.

공이 칠순(七旬)이 되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를 마지막으로 퇴관(退官)하니 왕은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을 가자(加資)하고 궤장(几杖)까지 하사(下賜)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고향인 탐라에 돌아왔다.

그 후 1157년(毅宗 11 丁丑) 2월에 공이 향년(享年) 70세로 별세하니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정사(政事)를 멈추고 조의(弔意)를 표하였으며, 왕은 여러 대신(大臣)과 사신(使臣)을 보내어 재궁동산(齋宮童山=濟州城南使)에 예장(禮葬)케 하고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

 

출처: 高氏宗門會總本部, 『耽羅星主』,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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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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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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