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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신문기사」제주도의 공산당 해녀와 결탁하여 쟁소 (濟州島の共産黨 海女と結んで爭騷)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1천5백여 명의 대군중이 주재소 부근 가까이서 데모하여 경관대를 습격하다 목포서원 무장해서 섬으로 건너감

(千五百餘名の大群衆が駐在所附近てデモリ警官隊を襲擊す 木浦署員武裝して渡島)

(제주발) 24일 오후 1시경, 제주도 구좌읍 면주재소 부근에서 해녀 그 외 군중 약 5백 명이 일대 데모를 거행해서, 해산을 명했는데도 응하지 않으므로 주모자인 것 같은 자를 검거하고, 밤이 들어 군중은 겨우 해산했지만, 해녀조합문제 등을 계기로 해서 구좌면, 서귀포방면의 공산당운동자가 책동한 상황이 있으므로 도 경찰부에서 11명 목포서에서는 중서경부보 외 21명의 경관이 무장하고 응원을 위해 24일 밤 출발하는 배로 섬으로 건너갔다. 나상전구(尚田口) 도사(島司)는 상도(上道) 협의 중이었지만 사건 돌발 때문에 앞의 응원 경관대와 함께 급거 귀도했다.

 

멀리서 에워싼 군중 주재소에 투석

결국 경관대와 충돌해서 경관 수명 부상

공산주의자는 표면 해녀를 제일선에 세워 그들은 뒤에서 책동해서 갑자기 구좌면 경관주재소 부근에 운집해 와서 멀리서 에워싸듯 주재소를 포위한 후, 금번 온 검속자를 돌려 보내라 돌려 보내라 하고 큰소리를 발하며 지금이라도 습격할 것 같은 시위운동을 개시해서 결국은 투석하는 등 사태는 매우 험악해졌다. 한편 동지역 경찰은 이미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경비도 매우 엄중히 행하고 있었지만 불량분자 천 수백 명이라는 대군중의 시위적 운동으로 되어 급보에 의해 본서 및 부근 주재소에서 4십 수 명의 경관이 현장으로 급행해서 해산을 엄명했지만 쉽게 해산할 기미가 없으므로 경관대는 주모자로 보이는 자의 검속을 개시했던 것인데 사건은 더욱 격화되어 결국 경관대와 소소한 싸움이 곳곳에서 일어나 폭행사태가 되어 모 형사는 검거 시에 왼손을 염좌부상 당하고 또 수명의 경관은 정복을 너덜너덜 파기 당했지만 경관대의 필사활동에 의해 이날 밤에 들어 겨우 해산했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2-01-26
저자명
목포신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6
첨부파일
65_19320126_029030(목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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