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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신문기사」제주축산의 지리학적 연구(4) (濟州畜産の地理學的硏究(四))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동경문리과대학 지리학교실 조교수 승전 일이(桝田一二) 4. 제주도우마 목축의 특이성 우마사육 양식에 대해서는 그 성질과 형식 등에서 대체로 3종의 경우가 생각된다. 즉 (1)종년(終年, 일년 내내) 방목 (2)계절적 방목 (3)축사 사육이다. 제주의 경우는 (1)의 종년(終年) 방목의 형식과 관찰된다. 목장 원래 본도의 목우마는 고려충렬왕 3년 정축해에 발단이 되었다고 일컬어지며 원의 다루가치(達魯花赤)라는 자가 우마 수십 두를 가지고 내도, 지금의 좌면 조천리 부근에 상륙, 같은 해 도내에 1 장소에서 10 장소에 달하는 목장 16개소를 설정, 여기에 말을 방목하고 한편 소목장으로 1 장소 내에 황태장(黃泰場, 현재의 구좌면 덕천리 부근?) 10장소 부근에 천미장(川尾場)에 현재의 정의, 동중 양면계의 천미천 연안, 모동장(毛洞場, 대정면 구억리 일원)을 설정 방목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일컬어지며 그 후 감목관이 설치되고 그 아래에 우감과 마감의 제관이 있어 직접 목자를 지도해서 관우마를 사육관리해서 양우, 준마를 산출, 후년 관유우마를 농민에게 기부해서 현재에 있어서는 거의 민유를 점유하고 있다. 현재 섬 안의 주봉 한라산을 둘러싸고 해발 200내지 300미터부터 경사 변환선에 해당하는 해발 600미터의 지점에 이르는 산중턱의 대상초지는 폭이 좁아 4킬로미터, 넓이는 8킬로미터 내지 10여킬로미터의 대상초지가 산간지대의 이름에 현존한다. 아마도 관목시대에 설정한 목장 흔적에서 면적 6만정보, 상록삼림지대와의 경계에는 상장성(上場城)이라고 칭해서 돌담을, 하부의 중간지대와의 교계에도 하장성(下場城)이라고 부르는 돌담을 축조해서 우마를 타 지역으로 침출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타 흔적이 지금도 잔존한다. 관목시대의 목장이 현재 또한 전승되어 토지이용의 형태가 한라산 중심으로서 아직 분석이 진전되지 않은 화산의 사면을 산기슭의 해안에서 해안지대(표고 영 미터―200미터, 최완경사부에서 토지 이용도 최고율 지역) 중간지대(200―약 250미터, 약간 경사도가 증가해서 반경작 반목 지대) 산간지대(350―600미터 방목지대) 삼림지대(600미터 이상에서 경사도 급변) 이상의 4대(帶)가 한라의 주봉을 둘러싸고 특색 있는 타원환상토지이용경(景)을 보인다. 그리고 본 도내 12면의 행정상의 각 면계는 중앙의 한라산정을 축으로 해서 방사상으로 해안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각 면과도 앞의 4대를 국비해서 똑같이 목장지대를 구내에 가지고 있다. 나아가 공통성은 섬의 지질이 모두 흑색의 현무암의 용암화산 쇄설물 30내지 50센티미터 크기의 각력 및 화산탄, 화산회 등이 거의 동일하게 분포해서 화산암력(礫)의 보편적 분포는 본도의 가장 큰 특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그 부지리적 단원(單元)으로서 지역성을 특색으로 하는 것은 그 위치에 의해 결정된 사면의 방향과 그 4대의 광협이 축산상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이루는 일이 된다. 방목과 돌담망 섬의 주읍 제주성내와 떨어져서 해안지대의 환상도로를 여행할 때 노상에서 만나는 우마의 수는 길을 걷는 사람보다도 훨씬 많다. 하물며 해안지대보다 중간산간과 수직적인 횡단로를 갈 때 노상에 휴한경작지와 방목지역에서 목격하는 우마 무리는 엄청난 것이다. 따라서 인가는 물론 경작지는 전부 12내지 1300센티미터 고도의 돌담이 축조되어 우마의 침입을 막고 있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5-04-20
저자명
목포신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2
첨부파일
171_19350420_062(목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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