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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전설: 신천강씨2

분야별정보 > 역사 > 인물



 우리 신천강씨 입도 할아버지는 전라도 감사를 하시다가 왕자난을 피해서 피신해가지고 서기 1402년 임오년에 이제 입향을 하게 됩니다. 어른이 오실 때에는 관복을 입고 오시다가 제주도 가까우니까 무인도에서 관복을 전부 벗으시고 평복으로 갈아입으셔서 현 제주목사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함덕 포구로 들어오셔서 그래서 함덕을 적거지로 삼아서 생활하시면서 우리 제주 고씨 할머니를 배필로 맞이해서 아들 세분을 낳게 됩니다. 그분의 둘째 아들이 정 셋째 아들이 복 넷째 아들이 만입니다. 큰아들은 귀자 존으로서 보령에 은거시키고 오셨기 때문에 여기에는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입도할아버지는 제주도에 오신 후에 많은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적거지에서 많이 교육활동에서도 공헌을 많이 하시다가, 오신지 11년 되는 해에 서거를 하게 됩니다. 그 해가 1413년이 됩니다. 그래서 이 어른이 돌아간 후 왕자난으로 인해서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할아버지 묘소를 아무도 모르게 여기 와서 모실 때 비석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했었는데 기건목사가 오셔가지고 이런 어른이 돌아가셨다고 하니까 지석을 마련해줍니다. 그 지석 내용은 ‘신천강영감사 임인은적어사 유정복만삼자 유충의청파지’라. 청파가 바로 기건목사의 호입니다. 청파가 그렇게 하면서 이것을 묻으도록 했기 때문에 그 지석을 땅속에 묻은 지 516년이 되는 해에 음력 3월3일 1937년 음력 3월 3일날 용범씨라고 한 분하고 정생씨라고 한 이 할아버지의 18대손이 와가지고 우리가 파보자 우리 할아버지 산인지 아닌지 모르니까 성묘만 할 것이 아니라 파야 되겠다, 그래가지고 이걸 팝니다. 근데 그 방묘 돼있는 그 앞에 파다보니까 지석이 나왔는데 큰 벼룻돌만한 것이 나온 거에요. 바로 그것이 아까 말씀드린 내용이 삽입돼있어 가지고 그날 그것을 깨끗이 씻고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 묘소에 경배하고 복배하면서 예를 드리고 그걸 가지고 어디를 갔느냐 서귀포로 걸어갑니다. 하룻밤 하루를 걸어가지고 거기에 누구한테 보이느냐. 강성익 우리 종장한테 보이니까 그 분이 감탄하면서 병풍을 치고 예를 올려가지고 그걸 잘 모셨다고 합니다. 그 강성익씨는 도지사까지 하셨지만은 실은 신천이 아니고 곡산이라고 하는 호적상 곡산이라고 쓰고 있었지마는 그걸 봐가지고 후에 그분이 종친회장까지도 합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이 산소를 하는데 37년도에 발현하니까 용범씨는 이것을 탁본해가지고 지석을 탁본해가지고 일본에 있는 교포 이런 분들한테 전부 보내서 헌금을 받아가지고 치산을 해야겠다. 그래서 자진해서 모든 종친들이 감탄하게 생각하면서 우리할아버지를 다시 찾아 모실 수 있다고 하는데 기분을 갖고 헌금을 모아가지고 이와 같은 환경을 조성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자손들이 이제 그 후에 할아버지 후손들이 도지사도 한 두분 나오시고 국회의원 참의원도 많이 배출이 되었고 후진들도 많이 이 할아버지 후손으로서 큰 영광을 얻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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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분야
역사 > 인물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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