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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전설: 강성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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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비석에 계신 강성익 할아버님께서는 이조 정조시대때 태어났고 21세 되던 해 정조시대죠, 정조 시대에 21세에 문과초시에 합격해서 이조시대에 관직을 두루 걸쳤습니다. 그 중간에 기록에 의하면 사천현감, 의성 비안현감해서 현감을 두 군데 한 기록이 있는데 사천현감 할 당시에 나올 때에는 주민들이 너무 고마워서 그 전별금을 주어도 전별금을 다 돌리고 아 내가 한 일이 없다 너무나 주민들이 고맙다 하는 인사를 받은 바 있습니다. 그 후에 쭉 현직도 지평, 장령까지 벼슬을 한 할아버님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오셔서 할아버지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초상을 아버지 무덤에서 3년 동안 움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아 삼시에 아버님에게 효를 다한 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또 더 나아가서 삼달리라는 명칭이 그 전에는 와갱이라고 했는데 그 성자 익자 할아버지께서 삼달이라고 개명을 하셨습니다.

강 성자 익자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입도조 영자 할아버지 12대손으로서 이조시대 영조시대에 출생하였고 정조 시대에 정조 때 와서 21세에 문과초시에 급제하셔서 그간에 이조시대 관직을 두루 걸치고 현감도 하셨고 지평도 하셨고 나중에 장령까지 하신 분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퇴임을 하신 후에 고향에 내려와서 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아버지 묘소에 3년동안 움막을 지어서 아버지께 효를 다했다는 전설 유래가 있고 또한 순조임금께 임금님을 향해 여기 헌수단을 직접 만들어서, 제작해서 만들고 아침저녁으로 북향을 해서 절을 했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또한 성익 할아버지께서는 옛날엔 이 부락이 와갱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삼달이라고 명칭도 개칭하셨던 할아버님이 되겠습니다.

이 삼달리라는 설촌은 성익 할아버지 부친인 일자 명자 할아버지께서 설촌하셨고 성익 할아버지께서는 갑인년에 흉년이 왔을 때 말을, 제주도 말을 삼천필을 공납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제주도민이 그 당시에 너무나 흉년이 지어서 가뭄에 천오백두 정도에 많이 죽었고 말수도 상당히 작황이 안 좋아서 그런 실정이, 어려운 실정을 주민 실정을 임금님께 상소해서 공납하는 것을 연기한 사례도 있고.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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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분야
역사 > 인물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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