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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전설: 이한우

분야별정보 > 역사 > 인물



제가 이제 소농 선생님한테 한문 공부를 하면서부터 선생님이 매계 선생님이 말씀을 하셔서, 저도 원래 고향이 신촌이고 하니까 관심을 가졌었죠. 그러면서 소농선생님이 매계선생님문집을 주셔서 보면서부터 매계선생님에 대한 것을 찾아보게 된 것입니다. 하다보니까 이분이 역사적인 인물도 아니고 흔적도 없고 단지 부해 안병택선생이 쓴 행장이 이분 행적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인데 그걸 기본으로 해서 했지만 행장에도 구체적인 햇수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하고 이걸 연결 지으면서 대충 매계선생님의 생애를 요약해봤습니다. 근데 매계선생님은 흔히 사회적으로 알려지기는 한우, 이한우라고 알려졌는데 원래 이름은 한진이었습니다. 나중에 진 자를 우 자로 고친거죠. 고치게 된 동기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고, 부해가 쓴 행장에 보게 되면 족보를 만들 때 고쳐서 우자를 썼다 이렇게 해놓고 족보에도 우로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 매계 선생이 매계 선생님보다 아버지가 6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만록에 보게 되면 할아버지 만서를 쓸 때에도 손 한진 서 이렇게 쓰고 예. 아버지 만서를 쓸 때에도 고 애자 한진 서 이렇게 쓰거든마씀. 그러니까 매계선생님은 정작 당신 이름을 당신은 한우가 아니고 한진으로 사용했단 겁니다. 그래서 요번에 매계선생문집을 할 때에도 객관적으로 알려진 이름이 한우니까 한우하고 괄호를 쳐서 한진 이렇게 썼어야 되는데 제가 그걸 미쳐 깊게 생각하지 못해서 이한진으로 적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 이거 이한우인데 왜 한진으로 쓰지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만서를 옮겨 쓴 때에 한진으로 썼기 때문에 매계선생님은 한우라는 이름 자 보다는 한진이라는 이름을 더 즐겨 쓰신 거 같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사회에 알려진 것은 이한진이 아니고 이한우로 알려져 있죠. 행장에 의하면 매계선생님은 아주 효성스러운 사람이었다, 이렇게 얘길 합니다. 그래서 평소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마음을 정성성 자와 효도효 자를 붙여서 성효 이렇게 표현을 했던데, 아주 지극히 효도를 한 사람이다 이렇게 평가가 됩니다. 그것이 조금 전설화되었다거나 우상화시켰다면은 아마 그 아버지하고 기일이 같은거.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6년 후에 기일 날 돌아오니까 제사를 마치고 운명했다. 그것이 매계선생님 효도를 나타내는 한 단서처럼 이야기가 됩니다. 그다음에 이제 행장에는 매계선생님 업적으로는 학덕 공부를 아주 많이 한 분이다. 공부를 아주 많이 했다는 것은 심재집 거기도 매계선생님에 대한 평가를 할 때 당시 시로서는 제일이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철종 때부터 고종 초기 고종 한 10년 그 이전까지 시기에 제주도에서는 아주 널리 알려진 학자로서 행세를 하였고 또 삼천서당 훈장도 그때 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이 되는데, 문집 보게 되면, 행장 보게 되면 부해선생이 쓴 행장에 목인배목사가 남토 남토의 태조다 아주 뛰어난 사람이다라고 평가를 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아마 그때가 대략 서른 살쯤이고 그때부터 삼천서당 훈장을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고종 2년 그때쯤에 문집에는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손자가 첫돌을 맞이한 날 쓴 시가 있습니다.

 

유형
동영상
학문분야
역사 > 인물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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