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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총서 제3권, 한라산의 역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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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한라산은 주민 생활에 자원을 제공하는 터전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신앙 행위의 대상으로서 인식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한라산과 주민 생활의 관계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생겨나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음은 각종 사서(史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라산이라는 명칭이 기록에 드러나는 것은 조선시대 1397(태조 6) 권근(權近)이 지은 어제시(御製詩)가 가장 이르다. 그는 탐라(耽羅)라는 시제(詩題)를 내걸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지었음이 태조실록(太祖實錄)11, 태조 63월 신유(辛酉)조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푸르르고 푸른 한 점의 한라산(漢羅山),

만경창파 아득한 속에 멀리 있네.

사람이 별[星芒]을 움직여 바다 나라에 왔었고,

말은 용의 씨를 낳아서 천한(天閑)에 들어갔다오.

땅은 궁벽되나 백성들이 업이 있어 살아가고,

바람이 편하면 장삿배가 겨우 오고가오.

성명의 시대에 직방(職方)에서 판적(版籍)을 꾸밀 때,

그 고장 누추하지만 부디 빠뜨리지 마옵소서.

그러나, 한라산이라는 명칭은 1374년 이전부터 이미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 고려 말 최영(崔瑩) 장군이 제주도 몽골족 목호세력(牧胡勢力)의 반란을 평정하러 왔던 1374(고려 공민왕 23)에 군대를 한라산아래 주둔시켰다는 사실이 고려사(高麗史)113, 열전(列傳), 최영전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한라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8, 제주목(濟州牧), 산천(山川)조에 은하(銀河)를 끌어당길 만큼 높다는 연유로 1481년 이전에 이미 붙여진 호칭이나, 봉우리가 평평하고 둥근 탓에 두무악(頭無岳), 혹은 원산(圓山)으로 일컬어져 왔었던 일도 기록되어 있다.

한라산이 오늘날과 같은 명칭으로 일컬어졌음이 확인되는 시기는 14세기 후반 무렵부터이다. 그러나, 한라산이 주민 생활 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훨씬 그 이전부터였다.

 

 

유형
기타
학문분야
총류 > 제주학
생산연도
2006
저자명
(사) 한라산생태문화 연구소
소장처
(사)한라산생태문화 연구소
조회
95
첨부파일
한라산 총서 제3권 한라산의 역사와 유적.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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