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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ㆍ3사건이 제주불교계에 미친 영향

분야별정보 > 종교 > 불교



제주 4ㆍ3사건(이하 4ㆍ3으로 약칭)1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제주불교 역시 이 4ㆍ3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데, 4ㆍ3시기를 통틀어 불교계에서는 기존의 제 기반이 순식간에 무너져버린 초유의 법난기(法難期)이라고 하겠다. 1945년까지 제주불교 관련기록에 나타난 사찰의 수는 대략 100여곳이다. 현재까지 조사된 결과에 의하면, 4ㆍ3으로 피해를 본 사찰은 35곳이며,16명의 승려들의 인명피해도 확인되었다. 기록에 나타난 100여 곳의 사찰 중에서 약 8곳의 사찰만이 파옥되거나 불태워지는 피해를 면했는데, 나머지 50여 곳은 그 행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2 또한 당시 승려나 사찰의 분위기가 일반 속인들과 함께 비승비속의 모습으로 생활했던 사례가 많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기록에 등재되지 않았던 사찰 수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당시 제주불교계의 피해는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증가할 수도 있다. 실제 근대시기에 대대적인 포교활동과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며 성숙된 불교운동을 정착시켜 나갔던 제주불교는 4ㆍ3 이후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황폐화되어버렸다.

4ㆍ3 이전 근대 제주불교의 모습은 크게 두 가지 흐름을 갖고 있었다. 조선시기 유림의 탄압으로 민중의 삶 속에서 역량을 쌓아오던 제주불교는 근대 초 활동의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민족사상으로 이어져 제주사회에서 항일운동의 불씨를 지핀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1918년 서귀포 법정악에 위치한 법정사에서 주지 김연일을 비롯한 강창규, 방동화 등 수명의 승려들이 7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국권회복을 외친 법정사 항일운동이었다. 이 흐름은 항일운동가인 김석윤이 1934년 범어사 제주포교소 월정사를 창건하여 그곳에 1938년 9월 선학원 후신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朝鮮佛敎中央禪理參究院) 제1지방분원을 설치하는 등 새로운 활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

유형
논문
학문분야
종교 > 불교
생산연도
2008
저자명
한금실
소장처
KCI
조회
45
첨부파일
제주 4ㆍ3사건이 제주불교계에 미친 영향.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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