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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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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 일대 옛길(영뒷골, 영두골)

분야별정보 > 사회과학 > 문화



  '영뒷골'은 영리청(營吏廳, 영리가 집무하는 청) 뒷길을 말하며 달리 '영두골'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관덕정에서 북쪽으로, 상아의 서쪽 길을 따라 가다가(관덕로 3길) 무진장모텔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무근성 7길의 좁은 샛길로 이 골목길과 주변 마을을 이른다. 

 

  '영리청(營吏廳)'은 과거 제주목관아 내의 홍화각(弘化閣) 터에 있었다. 즉, 홍화각은 안무사영(安撫使營) 또는 영리청이라고 했으며 군사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홍화각'이 영청이라 불리게 된 것은 제주목사가 전라도관찰사의 임무를 일부 넘겨받아 대정현감·정의현감을 지휘, 감독하여 제주도의 전권을 장악한 데서 유래하였다. 또한 불에 타기 전의 관아 명칭은 만경루라 하였는데, 홍화각은 왕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데서 명명하였다.

 

  당시 제주목사는 목민관이면서 동시에 전라도 관찰사의 군무를 위탁받은 수군, 병마의 군사령관의 역할(절제사, 후에 방어사로 바뀜)도 겸해 있었다. 이로 인해 목사의 집무처인 목관아는 판관의 집무처인 찰미헌을 이아라 부르는 것과 구분하여 상아로 불렀으며, 목사가 군사령관이라는 의미 또는 홍화각이라는 영청이 있어서 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므로 영뒷골은 영청(營廳)의 뒷마을 또는 뒷길을 의미한다.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서는 홍화각에 대하여 “연희각 남쪽에 있다. 세종 을묘년(17년, 1435)에 목사 최해산이 창건하였다. 예전에는 안무사가 정무를 보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영리청으로 사용하고 있다(在延曦閣 世宗乙卯 牧使崔海山創建 古安撫使政堂 今爲營吏廳)”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홍화각은 일제 때 1940년에 헐렸다.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서는 홍화각이 제주읍 삼도리에 있다고 설명한다. 1435년(세종 17) 최해산(崔海山) 안무사(按撫使)가 창건한 다음 1648년(인조 26)에 김여수(金汝水) 제주목사가 중수하였다. 안무사와 절제사의 영청으로 사용되다가 1713년(숙종 39) 제주목사가 방어사를 겸하면서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하여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으로 사용되었다. 그후 1772년(영조 48) 양세현(梁世絢) 제주목사가 중수하였고, 1829년(순조 29)에 이행교(李行敎) 제주목사가 개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학연구 23) 제주성 일대 옛길의 가치규명 및 보존 활용을 위한 기본방향 연구> 중에서​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5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50
첨부파일
38_영뒷골.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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