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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양씨 세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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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성(梁有成)(1684(숙종 10)~ 1761(영조 37))은 사절명사(四絶名士)의 일인으로 “네 사람의 빼어난 인물을 지칭하는데, 영조(英祖) 때 무관(武官)으로서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역임하였고 외모가 출중하였다고 전함

어린아이가 막 태어났는데, 얼굴을 보니 물소와 같이 넓은 이마에 눈에서는 광채가 솟고 보통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기상이 있어서 기특하게 여겨 많은 곡식과 돈을 보내고 잘 보살피라고 함

공은 자라면서 노는 데에서도 모든 어린이가 다 그 밑에 복종하고 그의 성품 또한 영매하고, 일찍부터 가정의 따뜻한 훈도를 받아 학문 문답에도 청산유수와 같이 막히는 곳이 없었음

또한 공의 기상은 호쾌하고 활달하였으며 무예에 특출했는데, 많은 병서를 탐독하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의 기상을 희망하고 있었음

어느 날 중국의 절강성 사람 오서신(吳書紳)이 공을 보고 극구 칭송하고, 그 후로부터 세상에 이름이 더욱 알려졌으며 곧 바로 정해년에 무과(武科)에 장원 급제하고 병마만호(兵馬萬戶)가 되었고, 정유년에 다시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첨중추수군절제사(僉中樞水軍節制使)가 됨

귀국 후에 이 이야기를 영종께서 전해 들으시고 공을 부르셨고, 영조께서 공의 위엄 있는 기풍과 당당한 위의를 직접 보시고 좌우를 돌아보며, “이 사람이 중국의 오서신이 칭송한 인걸이냐?” 하고 확인한 다음 대사마(大司馬)로 임명했으나, 늙으신 어버이가 계시오니 그 분들의 곁으로 가 어버이를 봉양하는 데나 힘쓰겠습니다. 공명에는 뜻이 없습니다. 또 어버이를 모시는 것은 자식 된 자의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됩니다.” 하고 귀향을 간청함

영조는 이에 감동하시고 변방에서 내직으로 불러들여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제수하심

양친이 돌아가셨을 때 초려(草廬)를 지으시고 3년의 예를 다 한 그곳을 세상 사람들이 ‘양보성의 터[梁寶城坪垈]’라고 일컬을 정도로, 공의 효성이 얼마나 지극하셨는가를 알 수 있음

『제주양씨삼도파족보(濟州梁氏三徒派族譜)』(1969)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17
첨부파일
제주양씨 세천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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