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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씨 종묘 탐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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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州道는 일찍이 耽羅王國이 터 잡고 오랜 역사가 흐른 땅이다. 高麗를 建國한 王建이 後三國을 統一한 직후인 九三八년 (高麗太祖二十一年) 麗朝는 耽羅에도 歸附하기를 요구하였으며 이에 高自堅王은 太子 末老公을 高麗에 入朝시켰다. 太祖는 큰 잔치를 베풀어 맞이하고 星主 王子 爵位를 수여하였으며 一代에 一面 朝會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耽羅는 高麗의 屬邦이 되었으며 星主時代가 열려 代代로 世襲이 이어졌다. 星主는 一代 末老公을 위시하여 維公 兆基公, 挺益公, 適公, 汝霖公, 貞幹公, 巡公, 福壽公, 仁旦公, 秀佐公, 碩公, 順良公, 順元公, 明傑公, 臣傑公, 鳳禮公으로 繼承되었다. 一一0五년 (高麗肅宗 十年)에는 耽羅가 高麗에 倂合되어 耽羅郡으로 새 出帆을 보게 되었지만 星主制度는 여전히 存續되었다. 星主廳은 高麗 守令과 竝立하여 二元統治를 담당하였다. 民亂이 발생하거나 큰 騷擾가 일어날 때는 高麗 守令의 힘으로는 鎭壓이 불가능하여 星主의 힘을 빌려 비로소 治定할 수 있었다. 星主는 濟州道民의 精神的 支柱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實權을 쥔 存在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一三九二년 (恭讓王 四年) 高麗가 멸망하고 朝鮮王朝가 開國하였다. 그로부터 十년 뒤인 一四0二년 (太宗二年) 高鳳禮 公은 星主稱號가 僭濫하다하여 자진 헌납하였다. 朝鮮王朝는 左右都知管制度를 마련하여 高鳳禮 星主에게는 左都知管 文忠世 王子에게는 右都知管을 除授하여 優待하였다. 이때까지 星主制度는 十七代 四六四年에 이르는 오랜 時代에 걸쳐 承繼하였다. 歷代 星主 가운데는 濟州의 星主로만 그치지 않고 高麗朝廷에 出仕하여 큰 業績을 남긴 분도 적지 않았다. 二代 星主 高維公은 一0四五년 (靖宗十一年) 南省試에 首席으로 登科하여 高麗朝에 顯官으로 入朝한 첫 濟州人이며 官職이 門下侍中右僕射에 이르렀다. 三代 星主 高兆基公은 一一0七년 (睿宗 二年)文科에 及第 官爵이 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 中軍兵馬判事 兼 西北面兵馬判事 등 要職을 거치며 守司空上柱國에 加資되어 政丞의 반열에 올랐다. 諡號는 文敬公으로 바로 이 耽羅苑 齋官에 墓域이 조성되어 있으며 濟州道史蹟記念物 第三十八號로 指定 保護되고 있다. 四代 高適公은 門下侍中 史部尚書로, 五代 高維公은 耽羅留摠管과 侍御史로, 六代 高汝霖公은 中書令 門下侍郞으로, 十代 高仁旦公은 按撫使 耽羅指揮使 耽羅摠管府 總管行署荷事로, 十二代 高碩公은 侍郞과 兵馬元帥 上將軍으로 十四代 高順元公은 門下侍中 吏部尙書로 十六大 高臣傑公은 戶部典書로 十七大 高鳳禮公은 濟州按撫使로 各各 高麗朝에 出仕하였다. 이렇게 耽羅 星主는 耽羅에서의 活動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며 高麗朝廷에도 참여하여 크게 貢獻하였다. 이제 耽羅宗姓(?)高氏 後裔들은 이 由緖 깊은 耽羅苑에 耽羅國王廟와 함께 星主殿을 세우고 王統을 이어 耽羅의 安寧을 베푼 歷代 星主列位를 우러러 配享하니 참으로 高氏宗門의 榮華가 만세에 無窮할 것이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5
첨부파일
탐라성주열성비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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