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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공 강영의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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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永(신천강씨 입도조) 강영

이태조(李太祖)의 왕비(王妃)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사촌오빠되는 강영(康永)이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있다가 삭탈 관직되어 유배인(流配人)의 몸으로 제주(濟州)에 들어온 것은 태종(太宗) 2년(1402)이었다고 봄.

❍ 태조(太祖) 7년(1398)에 일어난 『제1차 王子의 난(亂)』은 그의 이러한 기반을 산산조각으로 만들고 말았는데, 방원(芳遠)이 일으킨 왕자의 난(亂)은 강비(康妃) 소생인 방번(芳蕃)과 방석(芳碩) 형제가 참살당하는 비극이 연출된 만큼 강씨(康氏) 집안이 무사할리 없었고 외척(外戚)관계로 인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자초하지 않을 수 없었음

❍ 강영(康永)의 제주입도(濟州入道)를 둘러싸고 일설(一說)에는 왕위(王位)계승 싸움이 일어나 강비(康妃)소생의 두 왕자가 무참히 죽임을 당하자 강영(康永)이 자신에게 밀어닥칠 위해(危害)를 모면하기 위해 자진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제주도로 피신했다고 함

❍ 강영(康永)이 처음 도착한 곳은 북제주군(北濟州郡) 조천읍(朝天邑) 함덕리(咸德里)였는데, 큰 아들 귀존(貴尊)을 육지에 남겨두고 제주에 정착한 그는 얼마 후 고씨(高氏)부인을 배필로 맞아들여 정(禎)·복(福)·만(萬)의 세 아들을 낳고 향인(鄕人)들에게 충효(忠孝)의 길과 예의범절을 가르치니 그가 미친 학문적 영향과 사상(思想)은 이 땅에 파급되는 바 적지 않았음

❍ 시중공(侍中公) 강지연(康之淵)의 8세손인 그는 일찍이 문과(文科)에 올라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내면서 절의(節義)와 문장(文章)이 일세를 떨침

❍ 신천강씨(信川康氏) 제주입도조(濟州入道祖)가 된 강영(康永)은 이태조(李太祖)의 충실한 신하는 됐을망정 태종(太宗)의 입장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역신(逆臣)이어서 강영(康永)의 손자 풍실(豊實)·회생(回生)의 후손들은 해뜨는 동쪽을 갈망했음인지 구좌(舊左)·성산(城山) 일대에 많이 퍼지고 이후 표선(表善)·남원(南元)·서귀(西歸) 등 동부제주(東部濟州)에서 크게 번창함.

❍ 신천강씨(信川康氏) 입도조(入道祖) 강영(康永)의 묘소는 그가 62세의 일기로 별세한 지 5백여년이 지나도록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아 후손들에게 큰 숙제가 되고 있었는데 1937년 3월 3일, 첫 정착지인 함덕리(咸德里) 남쪽 대흘리 봉소동(鳳巢洞)에서 지석(誌石)이 발견됨.

「신천강영감사 임인은적어사 유정복만삼자 유충의청파지」

(信川康永監司 壬寅隱跡於斯 有禎福萬三子 有忠義靑坡誌)

❍ 후손들은 수묘(修墓)사업에 착수하여 묘소를 깨끗이 단장하고 제각(祭閣)을 새로 세워 해마다 3월 3일(그 후 양력 5월 5일로 바뀜)에 시제(時祭)를 모시고 선조(先祖)의 유덕(遺德)을 추모하고 있음

(信川康氏濟州道宗親會, 『瀛岩墓域擴張實錄 』)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1
첨부파일
감사공 강영의 묘역(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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