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 강씨 강성익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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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성익(康聖翊) : 1741년(영조 23년)~1819년(순조 19년)
- 성산읍 삼달리 입촌 시조 강일명의 장남으로 호는 명제(明齋)임, 처음 오봉조에게 글을 배우고 변성우의 문하생이 됨
- 1781년 본도의 유생들을 시취할 때 초시에 급제한 후, 1783년 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검교로 기용됨
- 예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지낸 후 청관으로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장령 등을 역임
- 1800년(정조 24년) 경상도 사천, 비안현감 등을 역임하였고,『탐라빈흥록』에는 양덕, 고산, 정의 현감 등을 지냄
- 그가 사천현감으로 있을 때 좌수가 쇄마전 400냥을 거두어주자, “내가 단기 재직으로 선정을 다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는데, 어찌 쇄마전을 받는단 말인가” 하자, 고을 사람들이 “ 우리 고을 명관이 떠나신다” 하고 애석해했다고 함
- 1973년(정조 17년) 어사 심낙수가 “강성익은 몸소 밭 갈고 나무를 베어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고 있다” 고 아뢴 것을 보면, 그의 효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고, 부모상을 당해도 애통 망극해가며 거상절차를 가례대로 엄숙하게 치름
- 1794년(정조 18년) 갑인년에 극심한 흉년이 들자, 도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각 목마장의 국마 3천여 필이 도난당하거나 아사하는 상황이 발생됨
- 목사는 삼읍 목마장의 목자들에게 변상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절반을 변상하고 “제주도에 심한 흉년이 들어서 도민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어, 없어진 국마 천오백여필을 변상할 능력이 없다고 상소하자 정조는 특명으로 구호양곡을 내려 보냄
- 1814년 제주찰리겸 위유어사 이재수가 내도하여 부모를 섬기고 도리를 다하고 강단을 지어 후진을 계도하는 것을 목격하고 상계하니 관직에 재등용 됨
- 은혜에 보답하고자 정결한 곳에 헌수단(獻壽壇)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북향배례하고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