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제주학 아카이브

제주학연구센터에서 수집한 소장자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천 강씨 강성익 헌수단 상소문

분야별정보 > 사회과학 > 문화



상소문(上疏文) 요약

전지평(前持平) 강성익(康聖翊)

[왕조실록영인본(王朝實錄影印本) 47-p.267] [정조실록(正祖實錄) 권54]

정조 24년(1800) 윤 4월 26일 강성익(康聖翊)은 제주에 자주 흉년이 들어 연해 읍민들이 구호곡을 이송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므로 비변사에서 관리하던 양곡을 옮겨 보관할 창고를 제주에 신설하여 흉년에 대비하도록 하고, 목사(牧使)는 수천석을 보관할 창고를 삼읍(三邑)에 각각 설치하여 양민들이 흉년에 대비하는 방안을 시행해야 한다고 정조대왕에게 상소하여 아뢰었다.

또한 강성익은 제주도의 마정(馬政)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갑인을묘년(1794-1795) 흉년에 폐사한 국마(國馬)가 무려 1500 여필에 이르렀습니다. 당시의 비변사는 목사로부터 흉년으로 인하여 국마의 징수가 곤란하다는 이유를 듣고 앞으로 5년 간 유예한 후 그 필수를 징수하도록 조치하였으나, 금년에 그 징수 기한이 다 되었는데도 수 년 동안 가난에 쪼들리어 목졸(牧卒)들의 형편이 매우 곤란하므로 그 실정을 고려하지 않고 징수를 계혹한다면 기필코 백골징수가 되어 큰 민폐를 끼칠 우려가 있사옵니다. 또한 신이 제주를 떠나려할 때 살아남은 백성들과 지친 목졸들이 제 앞에 몰려와서 호소하는 것이 수 일 동안 그치지 않았사옵니다. 도민이 절실한 심정을 신으로써 어찌 이를 듣고 보고도 주상님께 아뢰지 않을 수가 있사옵니까.”

주상(主上)이 재가하여 이르시기를, “그대는 내 곁에 있는 신하 중에서 가장 먼 변방에 살았던 사람으로써 그러한 민폐가 있음을 밝히니 심히 가상하도다. 곡물 창고를 만들고 보관하는 것은 당시 대신들의 의견도 도민을 위하여 나오기는 하였으나, 해외에서 수송하지 않도록 한 것은 그 뜻이 진실로 아름답다 할 지로다. 그대의 제언에도 또한 의견들이 있을지니 조정으로 하여금 초안하여 품의하도록 하겠노라. 마정사(馬政事)에 있어서는 공축(公畜)이 이전 수만큼 번식하였다면 어찌 다시 목졸(牧卒)에게 징수하겠느냐, 친족이나 그 이웃에게 징수하면 자연히 그 폐가 목졸외의 평민에게까지 파급될 것이니 어찌 가련하다 하지 않겠는가. 새로 부임한 목사는 아직 일언도 없으니 가히 맡은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즉각 조정에 명령하여 마필(馬匹)의 번식 실태를 목사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즉시 우마 담당 관청에 보고가 없을 때에는 이것을 논의하여 짐에게 아뢰도록 할 것이니 짐이 회답하기 전에는 일체 다시 징수하지 말게 할 것이다. 그대를 장영(掌令)으로 삼을테니 이제부터는 조정에 나와 다시 상세히 도의 실정을 아뢰라.” 하시더라.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30
첨부파일
헌수단 상소문 (3).JPG

제주학 아카이브에서 창작 및 제공하는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