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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암 마을 연혁

분야별정보 > 사회과학 > 문화



明道岩마을의 형성과정과 자치 연혁

‘明道岩’은 제주시의 중심에서 약 1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明道岩’마을은 해발 300m에 자리 잡고 있는 중산간 마을이다. 주변 서쪽에는 연안지오름, 동북쪽에는 칠오름, 서남쪽에는 안샘이(명도암)오름, 조래샘이(밧샘이)오름, 위(남)쪽으로는 큰 노루손이오름, 작은 노루손이오름, 거친오름, 민오름, 절물오름, 개월오름, 성진오름, 물장오리 등 이 고장 특유의 측화산 여러개로 드리워져 있다.

고려말에 자연환경이 빼어나고 광활한 지역의 ‘明道岩’은 천혜의 환경 속에 크고 작은 암자(쭝앞밭, 신중터)들의 중심으로 생활 터전을 마련하였고 축산업에 적합한 목장 삼소장, 산장(간장)이 자리잡고 있으며 최초 인가 형성은 헌마공신 경주 김씨(김만일계)가 마을 중심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연안지오름 북쪽(당가름)에는 명종년간 황해도 ‘장연현감’을 지낸 ‘高以智’의 가계와 진주강씨(어도리파)를 중심으로, 마을 북동쪽에는 남양홍씨와 제주고씨들이 농업과 목축업으로 생활하는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어 절터 곁에 고경곤(고이지의 자)이 사위 향현공 ‘明道岩’선생 김진용이 학문에 힘써 과거급제 한뒤 숙녕전 참봉’을 제수 받아 중앙에서 관직 생활하다 그만두고 돌아와 정착하면서 현마을 명칭인 ‘明道岩’으로 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현종 1년(1660년) 오현단 옆 목사(牧使) ‘이괴’(李襘)가 창건한 장수당에서 스승으로 맞아 교육에 전념하셨다.

‘明道岩’마을은 일찍이 문명퇴치에 앞장서서 개인 서당은 물론 봉개리민 전체가 참여하는 홍학회까지 조직하여 이웃 마을들의 교육의 중심지가 되어 활동하여 멀리에서는 조천 선흘에서까지 한학을 배우기 위하여 4.3항쟁(1948~1954년)이 일어나는 해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明道岩’에 와서 학문에 열중하였다. 4.3항쟁으로 수많은 인명피해와 가옥이 전소되었다.

1914년 ‘봉개’마을과 마을을 합하여 봉개리로 행정구역에 편제되었고 1955년 9월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함에 따라 봉개동으로 편입 현재 ‘明道岩’마을은 행정동 봉개동 사무소에서 관할하고 봉개동 4통으로 봉개동 지번 백단위를 관할하는 ‘明道岩’마을회를 구성 자연마을 자치권을 형성하여 지역을 구성하였다.

참고문헌: 제주도읍지

2007년 11월 13일 명도암 마을회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명도암 마을회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34
첨부파일
명도암마을 연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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