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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 명도암선생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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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암 선생 유허비(明道庵 先生 遺墟碑)

향현공(鄕賢公) 명도암(明道庵) 선생(先生)은 본관(本貫)이 광산(光山)으로 휘(諱는) 진용(晉鎔)이요 자(子는) 진숙(晉叔)이며, 시조(始祖) 신라왕자공(新羅王子公) 휘(諱)흥광(興光)의 25세(世) 손(孫)이시다. 1605(선조(宣祖)38)년에 탄생하셨으며, 1635(인조(仁祖)13)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하셨고, 1643(인조(仁祖)21)년 경학전강(經學殿講)에 거듭 급제(及第)하여 숙녕전(肅寧殿)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자 출사(出仕)를 사양하고 귀향(歸鄕)하시어 후학육성(後學育成)과 향토개화(鄕土開化)에 온힘을 기울였다. 1658(효종(孝宗)9)년 이괴(李檜)가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하여 위정(爲政)의 제일(第一)을 학문진흥(學問振興)에 두고, 선생을 초빙(招聘)하여 준재(俊才)를 양성(養成)하였고, 1659년 선생과 경륜(經綸)하여 학사(學舍)를 창건(創建) 상설화(常設化)한 것이 장수당(藏修堂)이요, 후일(後日)에 귤림서원(橘林書院)이며 오늘날 오현단(五賢壇)이 그 유서지(由緖地)이다. 이것이 제주학교(濟州學校)의 효시(嚆矢)인 것이다. 선생께서 직접 교수(敎授)하여 후진양성(後進養成)에 진력(盡力)하니 교학(敎學)이 흥융(興戎)하고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미개한 지방 풍속을 일변(一變) 혁신(革新)하고 유학(儒學)을 발흥(勃興)시키니, 만인숭앙(萬人崇仰)의 남방유종(南方儒宗)이 되시었다. 후학(後學)과 세인(世人)들이 그 업적(業績)을 찬양하여 명도암선생(明道庵先生)이라 칭하니 선생(先生)의 아호(雅號)가 되었다. 1663(현종(顯宗)4)년 12월 7일 서거(逝去)하니 향년(享年) 59세(歲)이시다.

배위(配位) 제주고씨(濟州高氏)(1604~1686)와의 슬하(膝下)에 7남1녀를 두시니, 오늘날 그 후손(後孫)이 일만여(一萬餘)에 이르며, 대교동파(大橋同派) 파조(派祖)가 되셨다. 1831(순조(純祖)31)년 이예연(李禮延) 목사(牧使)는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선생을 영혜사(永惠祠)에 추향(追享)하여 학덕(學德)을 기렸으며, 1849(헌종(憲宗)15)년 향현사(鄕賢祠)에 이향(移享)하여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선생과 함께 모셔 향사(享祀)하고 향현(鄕賢)으로 추앙(推仰)하였으며 매년 양력 10월 15일에는 오현단(五賢壇) 향현사(鄕賢祠)에서 제주시청(濟州市廳) 주최로 향례(享禮)를 지내고 있고, 음력 3월 3일에는 대교동파종친회(大橋同派宗親會)에서 묘제(墓祭)를 봉향(奉享)하고 있다.

유허비(遺墟碑)가 있는 이곳은 선생이 거처(居處)하며 양덕상지(養德尙志)했던 곳으로 그 업적(業績)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1965년 10월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비문(碑文)은 문학박사(文學博士) 이숭녕(李崇寧) 선생이 지었고, 글씨는 서예가(書藝家) 안동(安東) 김충현(金忠顯) 선생이 쓰시었다.

2007년 4월 5일(淸明日)

광산김씨 대교동파 종친회(光山金氏 大橋同派 宗親會)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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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명도암선생유허비안내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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