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린 진사의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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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린(金錫麟)진사 1828년~미상)
- 본관은 경주이며 김재온의 아들로 제주목에서 태어나서 1828년 조선 순조 때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해서 진사가 됨
- 1842년 우도에서 기경허가가 내리자, 1844년(조선 헌종 10년) 김진사는 대과를 포기하고 낙향하여 소섬(우도)으로 들어가 개척자가 되고 입경자들과 주민들의 훈학에 힘씀
- 제주목사는 입경허가를 내리자 유민으로 하여금 농산물과 해산물에서 얻은 수익금의 일부를 세금으로 사복시에 내리도록하자, 세폐와 관폐에서 오는 어려움을 알아 우도민 편에서 감면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등 주민을 위해 봉사와 헌신을 실천하였음
- 김진사가 죽은 후 우도에 들어온 유민들은 김진사의 공적을 기리어 우도 입경 허가 60주년인 1902년에 진사 김공석린 유애비(進仕 金公錫麟 遺愛碑)를 소섬 중앙에 건립함
- 1904년에 정의골 성읍 마을의 오완철(吳完哲)이 초빙되어 훈학이 계속 되면서 그는 소섬이란 명칭은 속되니 연평(演坪)이라고 지음
- 본시 소섬은 황량한 무인도였으나 1697년(숙종 23)에 목사 유한명(柳漢明)이 말을 방목하여 공마(貢馬)하는데 기여함
- 우도에 입주한 후 기존의 이주민들과 인접하여 생활하는 것을 피해 영일동 후편에 거처를 마련하고 생활하였으며 그 인근에 영일동 주민들이 음료수로 사용하였던 물통이 있는데 이 통을 ‘진사통’이라 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이곳에서 마을제를 거행하면서 기리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