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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린의 진사터와 진사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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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린의 진사터와 진사통

소섬은 1842년 조정에서 갈아먹도록 허가하자 제주목 좌면의 개척적인 유이민(流移民)이 들어와 다다음해에 진사(進士) 김석린(金錫麟)이 훈학하던 진사터다. 또 물통은 당시 축조한 것으로 흔히 진사통이라고 불려진다. 김진사는 조천리의 선비 난곡(蘭谷) 김양수(金亮洙)의 선친으로 1828년 진사시험에 합격한 최고 지성인이었다. 특히 관리들의 횡포와 과다한 세금을 감면해주고 소섬의 교육을 전담하였다. 주민들은 회갑년인 1902년 4월에 그를 기리어 [진사 김석린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이어 1904년에 정의골 성읍 마을의 오완철(吳完哲)이 초빙되어 훈학을 계속하고 오(吳)는 소섬이란 명칭은 속되니 마을 이름을 연평(演坪)이라고 지었다. 본시 소섬은 황량한 무인도였으나 1697년(숙종 23)에 목사 유한명(柳漢明)이 말을 방목하여 공마(貢馬)하는데 기여했다. 1702년 목사 이형상(李衡祥)의 [탐라순력도]에도 말과 목동만이 그려졌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38
첨부파일
김석린의 진사터와 진사통.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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