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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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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리 금대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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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면(前面)

        緦弟瀅植撰
梨洞路左有小岡其形
如琴其名琴山山下有
書齋是我晩翠先生故
宅也先生每與冠者五
六童子六七嘯咏于此
山山之一木一草無非
錦囊中物先生歿後山
之名幾與世人相忘及
門諸生恐遺墟湮蕪與
先生之子允煥謀伐石
築臺名之以琴臺銘曰
  先生存而山巍巍
  先生逝而山寂寂
  石不泐而臺兀兀
  仰彌高而銘歷歷 
◌ 우측면
            孔子降生 二千四百七十六年
            歲在乙丑暮春者 建
◌ 좌측면 
           後學 金濡培 書
           門人 吳平元 鎸

【해석】
<금대명(琴臺銘)> 병서(幷序) 
     - 팔촌동생 벌 되는 형식(瀅植)이 찬(撰)함.

  배동네[梨洞] 길 좌측으로 작은 언덕배기가 하나 있는데, 그 형세가 마치 비파[琴]와 같이 생겨 금산(琴山)이란 이름으로 불려졌다. 그 산 아랫자락에는 서재가 있는데, 바로 우리 만취(晩翠) 선생께서 사셨던 옛집이다. 선생은 매번 관을 쓴 성인 남자 대여섯 명과 아이들 예닐곱 명과 더불어 소리를 길게 뽑아 시를 읊조리곤 하였다. 이 산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모두 훌륭한 시의 소재가 아님이 없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산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몇 번 거느리곤 하다가 서로 잊혀져가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급기야 문하의 여러 제생들이 선생이 사시던 옛 터가 묵어감을 두려워한 까닭에, 선생의 큰 아들 윤환(允煥)과 더불어 돌을 갈고 대를 쌓기를 도모해 이름 짓기를 금대(琴臺)라 했다. 명(銘)하여 이른다.

  선생이 살아 계실 적엔 산이 높아 커 보이더니,
  선생이 돌아가시자 산이 적막해져 버렸네.
  돌은 닳아 없어지지 않고, 대는 우뚝 솟았으니,
  우러러 볼수록 그 비명(碑銘) 더욱 뚜렷하기만 하구나.        

  공자(孔子) 탄생 2,476(서기 1925)년, 을축(乙丑)년 저무는 봄에 세우다.
           후학(後學) 김유배(金濡培) 글씨 씀,
           문인(門人) 오평원(吳平元) 글씨 새김
​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5
첨부파일
조천리 금대 측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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