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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진사 정헌 김선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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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순조 32년(임진년, 1832, 24세) 전주에서 시행한 승보초시에 입격하고, 다음 해 복시에도 입격 하였다. 또한 헌종 4년(무술년, 1838) 제주 승보 초시에, 헌종 7년 승보복시(신축년, 1841)에 또 다시 입격하였다.

헌종 9년(계묘년, 1843, 35세) 진사시험에 3등으로 영예롭게 합격하고 귀향하였다. 제주에서 양친이 차례로 돌아가자 치성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그 때마다 제주 목사가 부임 후 맨 처음 문상을 받는 영예를 안았다.

선생은 향리에 은거하여 출사(出仕: 벼슬)하지 않은 고매한 학자(南州高士)로서 먼저 천거 받아 9차에 걸쳐 제주향교 교수 겸 정의ㆍ대정 3향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특히 선생은 1854년(철종 5년) 목인배(睦仁培) 목사가 제주 향교에 계성사를 창건할 때 계성사 현판(題額)을 직접 쓰고 게시하였다.

선생은 조선 당시 최고 국립대학교인 성균관(現 사립 성균관대학교 전신)에 입교하여 40세까지 6년 동안 수학하였다. 그 당시 성균관에서 높은 선진 하문을 연찬한 자가 10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선생의 문채(문장과 글)는 전국 123개 주에서 올라간 성균관 유생(儒生)가운데 으뜸이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6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1
첨부파일
성균진사 정헌 김진사비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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