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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돌하르방의 종합적 연구

분야별정보 > 사회과학 > 문화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제주도의 상징물인 돌하르방은 문헌기록상 1754년(영조 30) 김몽규(金夢煃) 목사에 의해 처음 세워졌으며, 조선시대 제주 3읍성에 48기가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는 제주읍성(濟州邑城)의 24기 가운데 23기(1기 분실), 정의현성(㫌義縣城) 12기, 대정현성(大靜縣城) 12기를 합하여 모두 47기가 전해지고 있다. 1971년에는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2호로 45기를 지정하였으며, 1960년대 중반에 서울 경복궁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로 옮겨진 2기는 제외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제주 고유의 돌조각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돌하르방에 대하여 지역별 형태, 미술사적 연원과 제작시기, 조형특성을 문헌 자료조사 및 형태비교분석 등의 연구방법으로 좀더 면밀하게 고찰해볼 것이다. 돌하르방의 재질은 다공질 현무암(玄武岩)이지만, 지역에 따라 흰 사장석(斜長石), 검은 휘석(輝石), 노란 감람석(橄欖石) 반정(斑晶)광물을 함유하거나, 비현정질(非顯晶質) 또는 유상엽리(流狀葉理) 구조 등으로 다양하다. 돌하르방의 연원은 기존의 문화인류학적 관점인 남방기원설․북방기원설, 민속학적 관점인 육지전래설․제주자생설 이외에, 새롭게 미술사적 관점에서 보면 육지전래설의 돌장승 형태와 제주 복신미륵의 영향이 서로 융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제작시기와 관련해서는 돌하르방이 만들어진 때보다 160여년 지난 1918년에 와서 야 문헌기록이 처음 등장함으로써, 많은 연구자들이 제작시기에 대해 깊이 신뢰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런 문제점을 해소하고자 2가지 분석방법으로 살펴보겠다. 첫째는 문헌분석으로서, 1918년 김석익(1885~1956)이 쓴 『탐라기년(耽羅紀年)』에 많은 영향을 준 현덕문(1817~1876)의『탐라기략(耽羅記略)』고찰이다. 그렇지만 책이 현존하지 않아 대신에 현덕문의 저서에서 돌하르방 즉 옹중석(翁仲石) 기록이 나올 가능성 여부를 검토하였다. 연주 현씨 족보에서 그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10세까지 함께 지낸 증조부인 유학자 현광보(1739~1826)가 15세 때 돌하르방이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실제적 경험을 근거로 현덕문의 저서에서 충분히 다룰 개연성이 높으며, 이를 탐독한 김석익 또한『탐라기년』을 저술하면서 그대로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둘째는 기능을 고찰하는 방법으로서, 돌하르방이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하여 세워졌을까 하는 점이다. 제주읍성에는 3성문마다 8기씩 24기, 정의현성과 대정현성은 3성문마다 4기씩 12기를 각각 세웠다. 이는 육지 돌장승처럼 읍성을 보호하는 수문장 역할은 물론, 주민 안녕(安寧)을 위한 방역(防疫)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돌하르방의 조형특성에 있어서는 많은 영향관계가 있다고 여겨지는 육지 돌장승과 구체적인 형태비교분석을 함으로써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5
저자명
황시권
소장처
명지대학교 도서관
조회
42
첨부파일
제주 돌하르방의 종합적 연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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