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제주학 아카이브

제주학연구센터에서 수집한 소장자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주 공동체문화와 4.3항쟁의 발발 조건

분야별정보 > 사회과학 > 문화



 탐라문화 49호

 

페르낭 브로델(Fernard Braudel)의 ‘3중 구조’이론을 적용하여 제주 특유의 공동체문화가 구축되는 과정을 역사 전개 속에서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4・3항쟁의 발발 조건을 분석하고 있는 논문이다. 제주도는 ‘삼재(三災)의 섬’이라고 할 정도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다. 󰡔송당본풀이󰡕에 수렵문화와 농업문화의 결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해상 교역으로 나아가는 양상이 드러내는 바, 과거 제주인들은 이러한 조건을 절박하게 깨달았던 것 같다. 유물 및 사료를 통해서는 중국의 한(漢), 한반도의 삼한(三韓), 일본 등과 교역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수출 품목은 1276년 원(元)이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한 이후부터 많은 이윤을 남기는 말로 바뀌었다. 그런데 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의 태종, 세종 대에 이르면서 제주의 말 산업은 국가의 통제 대상이 되어 버렸고, 말 도살에서 생긴 부속물의 매매까지 견제 받으면서 붕괴되고 말았다. 말 산업의 몰락으로 생계가 어려워진 제주인들은 유민(流民) 혹은 수적(水賊)이 되어 한반도 주위 바다를 떠돌았다. 이를 막기 위해 내려진 것이 1629년의 출륙금지령이었다. 200여 년 지속된 출륙금지령 속에서 제주는 육지와의 민간 교류가 막힌 채 척박한 환경에 맞서면서 생존을 이어나가야 했다. 마을 단위 공유를 바탕으로 하는 제주 특유의 공동체의식은 이 과정에서 구축되었고, 그러한 정신이 제도로 정착된 것이 수눌음이다. 또한 마을공동체는 신앙공동체의 성격까지 끌어안고 있었으며, 제주인들은 유교 이념에 입각하여 신앙을 탄압하는 중앙권력에 대한 저항 속에서 배타적인 분리의식을 키워나갔다. 근대로 돌입하여 마을공동체가 강화된 것도 주목해야 한다. 지주자본이 진출하지 않아 농촌공동체가 그대로 유지되었던 데다가, 종래 국유지였던 목장지대와 해안 어장이 마을 공유지로 전환된 것이 그 동력으로 작용하였다. 해방을 맞은 제주인들은 이러한 마을공동체에 입각하여 지방 분권주의가 들어서기를 열망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이 실시한 일련의 정책들은 이를 위배하였으며, 육지에서 파견된 세력은 대결 구도를 만들어 나갔다.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9연대가 4・3을 제주 대 육지의 대결로 보고 개입을 꺼린 끝에 제11연대로 교체된 것은 당시 갈등의 양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여기에 4・3항쟁을 다루는 많은 소설들이 제주 특유의 공동체의식에 초점을 맞춰 형상화하고 있는 근거가 있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사회과학 > 문화
생산연도
2015
저자명
홍기돈
소장처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조회
55
첨부파일
(홍기돈).pdf

이 자료의 저작권은 원저자에게 있습니다. 자료 사용 시 원저작권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