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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제주 정려비 현황과 분석

분야별정보 > 사회과학 > 사회



제주도연구 제47권

  제주도에는 다양한 종류의 조선시대 비석군이 산재하고 있다. 목민관 비석, 유허비, 정려비(충효·열비) 등 제주도는 '금석문의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본고는 조선시대 제주에 내린 정려에 대한 문헌 조사와 지역별 정려비 전수 조사를 함께 이룬 결과물이다. 문헌에 실린 제주의 효자, 열녀, 충의(사)는 총 84명의 사례가 파악되었지만, 정려비는 총 71기(77명)로 조사되었다.

  정려비 71기의 지역별 소재는 제주시 50기(52명), 서귀포시 21기(27명)이다. 특히 제주시 북서부 지역인 애월읍, 한림읍, 한경면 지역 소재 충효열비가 총 33기(34명)이어서 제주 전역의 충효열 정려비 중 절반에 해당한다. 서귀포시 지역은 충효 및 충의비가 다수 소재하며, 특히 성산읍과 대정읍에 집중되어 있다.

  내용별로는 효자 21기(21명), 효열 20기(20명), 열녀 20기(18명), 충효4기(6명), 충의 6기(12명)로 구분된다. 성별로는 남자 29기(37명), 여자 42기(40명)이다. 효자 정려비는 대부분 부모를 정성스레 봉양 또는 간병하여 정려되고 있다. 가장 많은 사례가 작지, 할경 등 자기 신체의 일부를 절단하여 소생 및 연명시키는 경우이다. 효열 정려비는 대부분 봉향(시부모) 또는 간병(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하여 정려되었다. 가장 많은 사례가 종신 수절하며 시부모나 남편을 봉양하고 간병하는 경우이다. 열녀 정려비는 대부분 남편이 죽은 후 자결하거나 종신 수절하는 경우이다. 충효 정려비는 효자이면서 나라(임금)에 충성을 다해 '충효'의 정려를 받은 경우이다. 대부분 국상 때 3년복 시행, 직접 상경하여 능역 참가 등으로 받았다. 충의 정려비는 '의사'와 '의녀'로 구분되는데, 일본 어부의 약탈에 저항, 프랑스 외세 침략에 저항, 빈민구휼, 유배인 보호 등의 이유로 수여한 경우이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사회과학 > 사회
생산연도
2017
저자명
홍기표
소장처
제주학회
조회
23
첨부파일
조선시대 제주 정려비 현황과 분석_홍기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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