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제주학 아카이브

제주학연구센터에서 수집한 소장자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냉전체제 형성기의 국가건설과 민간인 학살: 제주4·3사건과 그리스내전의 비교를 중심으로

분야별정보 > 사회과학 > 정치



제주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본 논문의 목적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냉전체제 형성기의 국가건설과정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과 그리스내전은 공간적, 내용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논리와 구조 속에서 민간인 학살을 야기한 사건이었음을 밝히는데 있다. 또 제주4·3사건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에 가까운 2만5천~3만여명이 희생된 이유를 국제적 맥락에서 규명하는데 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냉전체제 형성기의 신생 독립국가들이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국가건설이었다. 종전 이후 세계는 이전과 다른 국제질서를 요구하였고, 국가건설과정에서 일어난 제주4·3사건과 그리스내전은 미-소의 대결 구도 속에서 미국의 대소봉쇄전략이 구현된 사건들이었다. 20세기 그리스와 남한은 제국주의 침탈 이후 유사한 역사적 경로를 걸어왔다. 그리스는 독일의 침탈을, 한국은 일본의 침탈을 경험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해방 후 양 국가에서 정치사회적 갈등의 심화와 확대를 가져왔다. 1944년 10월 해방을 맞은 그리스와 1945년 8월 해방된 한국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상황’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양국은 국가건설과정에서 외세의 지원에 힘입어 위기를 극복하였다. 냉전체제 형성기 그리스와 제주도에서는 미국의 개입과 함께 정부군에 의한 대게릴라전이 전개돼 민간인 학살을 초래하였다. 그리스내전은 대체적으로 독일의 점령 시기인 1943년 시작돼 1949년 끝난 것으로 간주하지만 전면적이고 본격적인 내전은 1946년 3월 일어나 1949년 10월 종결되었고 내전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10만-15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스내전은 트루먼 독트린의 선언과 함께 냉전의 공식화를,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 봉쇄전략을 가져왔다.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응한 전 세계적인 봉쇄정책으로 나타난 트루먼 독트린은 이후 미국의 냉전정책과 제3세계 정책의 모델이 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트루먼은 보좌관들에게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라며 “우리가 충분히 강력하면, 우리가 그리스에서 했던 것과 같이 그들(공산주의자)에게 맞선다면, 그들은 어떠한 조처도 취하지 못할 것이다”고 말하였다.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의 기조 하에 동아시아에서 ‘반공의 보루’를 구축하기 위해 남한에서 반공-우익정권의 수립을 원하였고,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우익세력을 지원하였다. 그리스내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이루어진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제주도를 비롯한 남한 각지에서는 좌·우익간의 대립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이데올로기의 전쟁터’가 되었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자 주한미군은 제주도를 ‘동양의 그리스’로 비유하고 주목하였다. 제주도는 19세기 말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열강의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제주도에 대한 인식은 제주4·3사건의 전개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제주도를 ‘동양의 그리스’라고 인식한 주한미군의 시각은 이러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제주4·3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미국 

유형
논문
학문분야
사회과학 > 정치
생산연도
2010
저자명
허호준
소장처
제주대학교 중앙도서관
조회
12
첨부파일
냉전체제 형성기의 국가건설과 민간인 학살-제주4.3사건과 그리스내전의 비교를 중심으로.pdf

이 자료의 저작권은 원저자에게 있습니다. 자료 사용 시 원저작권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