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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관악 발전사와 제주의 관악 발전사에 대한 비교 연구

분야별정보 > 예술 > 음악



경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제주는 지정학적으로 중국, 일본 및 기타 동북아시아의 요충지이며 세계의 정상들이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개최하였고, 세계 평화의 섬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관련 억지주장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및 동북공정 등으로 그 어느 때 보다도 역사에 관한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상황이다. 왜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여 본다면, 일차적으로 우리 자신 스스로가 역사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하여 역사에 대한 개념과 정립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음으로서 국내외에서 공인받지 못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본 논문은 대한민국 서양음악의 발전과정을 연구하였고 그 역사를 통하여 제주의 관악(管樂)의 역사를 정립해보고자 하였다. 물론 음악분야의 역사 관련 논문으로서 역사적 배경이나, 과거에 국한하지 않았다. 최근 제주에서 개최되어진 음악축제 및 관악관련 축제(제주관악제, 제주국제관악제, 앙상블축제, 아시아·태평양 관악제, 세계 마칭쇼 밴드 챔피온쉽등)의 내용을 다루었다. 제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관악분야의 축제는 독특한 제주 관악의 역사적 배경이 근원이 되었고, 이러한 제주 관악의 역사는 우리나라 관악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제주의 관악분야 유입 배경 이전에 우리나라 관악의 역사를 본다면 다음과 같다. 1876년 조선은 한·일 수교를 체결하여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였고 1882년 5월 22일 한·미 조약이 체결되었다. 당시 청(淸), 로(露), 일(日)등 강대국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던 고종은 군대 창설이 시급한 문제라고 인식하였다. 이후 1896년 5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주축으로 특사를 파견하였는데 대관식 행사에서 서양음악 연주와 군악대의 모습에 한국 사신들은 자극을 받았고 귀국 후 민영환은 군사 개혁안을 추진하면서 군대지휘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군악대 도입을 건의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1897년 3월 러시아 악기를 구입하기로 결정하여 한국 최초 곡호대(曲號隊)의 발족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이 한국 관악대의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제주에서 관악의 시작은 일제치하 시대였던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의 교육정책으로 인하여 몇 개에 불과했던 보통학교가 1923년 4개교의 신설을 시작으로 1930년대 중반에 20여 개로 늘어났고 군국주의 교육과 군사훈련 등의 필요성에 의해 학교 관악대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주의 관악의 활동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일본의 패망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1946년 제주중학교 15인조의 교악대가 김국배에 의해 발대되면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예술 > 음악
생산연도
2007
저자명
김지혜
소장처
가천대학교 중앙도서관
조회
26
첨부파일
한국의 관악 발전사와 제주의 관악 발전사에 대한 비교 연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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