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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면 용수리 절부암 전설

분야별정보 > 문학 > 구비문학



절부고씨는 저지리의 명의논(명답동)에 사는 고응종(초명은 응추)의 딸인데, 그의 아버지는 서귀포 하원리에서 하효리에 사는 친구 강성일과 개간할 곳을 찾아 한경면 저지리에, 강성일은 조수리에 이주하였다.

강성일은 남매를 낳아 성혼시키고 손자까지 보았으나, 질병으로 아들과 손자를 잃은 후에 아들을 얻었으니, 이가 바로 고씨의 남편인 강사철이다.

누나는 동생을 짝지어 주려고 애썼으나, 가난한 고아에게 딸을 줄이 없어 아버지의 친구인 고응종을 찾아가 “우리 부모에게 분향할 후사가 끊기게 되었으니 따님을 주십사”고 간청하니, 그는 친구의 정의를 생각하여 19세인 딸을 강사철에게 출가시켰던 것이다.

이 젊은 부부는 비록 가난하였지만 화목하고 부지런하며, 고기 낚기, 남의 품팔이, 해조류와 패류 캐기 등 고된 줄 모르게 앞날의 꿈에 부푼 나날을 보내었다

그해(계축년, 1852)도 다가기 전에 겨울 농한기에 죽세공품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보태려고 동지달 13일, 남편은 동네 어른 좌여은, 홍연득과 함께 떼배를 타고 차귀도(죽도)에 가서 대를 베어서 지세개 포구로 돌아오다가 풍랑으로 인해 침몰하였다.

그의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찾아 3일간 음식을 전폐한 체 해안을 해매었는데, 짚신이 헤어져 발바닥은 피가 낭자했다.

밤에는 짚신을 삼아서, 그리고 날이 새면 그 짚신을 신고, 다시 해안으로 남편의 시신을 찾아나섰다.

남편이 죽은 다음날 좌여은의 시체가 떠올랐으며, 또 그다음 날엔 머리가 잘려 없어진 시신이 떠올랐는데 누구의 것인지 분간을 못했다. 그 때 홍연득의 옷을 지어준 여인이 있어, 겹옷을 지을 때 안감이 모자라서 기저귀 조각을 대었으니, 옷을 벗겨보면 알 것이다“ 는 증언에 확인한 바, 홍연득의 시체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실망한 부인은 그날 밤 엉덕동산 바위 밑의 후박나무에 목메어 죽으니 아까운 나이 19세였다. 그 뒤 3일 만에 남편의 시신이 그 부인이 목매었던 엉덕아래 떠올랐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당산동쪽 비탈 (고산과 용수리 경계) 일주도로에서 보이는 70리 거리에 합장하였다.

이를 보고 듣는 사람마다 ‘조아의 포시와 같다’고 칭송하였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문학 > 구비문학
생산연도
2015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4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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