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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좌자이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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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좌자이(左自以)와 좌가장(左可場) 

 청주 좌씨 입도 이세(二世) 이신 휘 자이는 신의(神醫)로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의술에 능통한 명의였다. 어느 해 왕후가 불치의 병에 걸려 백약을 써봐도 효험이 없었다. 그 때 일관이 별자리를 보고 남쪽 절해고도에 명의가 있는 바, 그 의원만이 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아뢰었다.

 그래서 그를 찾던 중 탐라에 ‘좌자이’라는 명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왕이 즉시 입궐토록 명하자 자이께서는 입궐하여 왕후의 병을 보니 고황지질임을 알고 그 자리에서 비방으로 영약을 조제하여 복용토록 하였더니, 며칠 후 왕후의 병이 완치되었다.

 이에 탄복한 왕은 한동 일대의 토지를 하사함으로써  ‘左可場’ 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청주좌씨 입도조인 휘 형소(亨蘇) 는  시조인  좌구명 (左明丘)의  67세 손으로 13세기 말 고려 왕조가 몽고에 복속된 후 제주에 설치된 탐라총관부 감목관으로 부임하기 위해 입도했다. 

 중시조인 휘 형소의 부친은 원나라 천관시랑(天官侍郞)을 지내신 휘 성보(星甫)인데, 탐라총관부(耽羅總管府) 감목관으로 입도 정착하게 된 것은 원나라가 몽고마 164필을 수산평 (현재 성산읍 수산리)에 방목시킨 것이 고려 충열왕 3년(1275년)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중시조께서 입도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 고려 충열왕 초기로 추정된다

  당시 원은 탐라 총관부에 감목관을 두고, 그 밑에 단사관과 만호를 두어  목축과 목민을 주관하였다. 중시조께서는 현 구좌읍 한동을 생활근거지로 삼아 1소장(현 송당목장 중심)을 중심으로 한 한라산 동북부 지역의 목축은 물론 목민까지 주관하셨고, 감목관직을 대대로 세습하여 이 땅의 청주 좌씨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도 구좌읍 한동리 일대가 ‘좌가장’으로 전래되는 점으로 미루어 당시 좌씨 가문의 위치가 얼마나 컸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대대로 감목관 직을 세습하며 살아오다가 공민왕 24년(1374) 목호의 난이 평정되면서 감목관직을 반납하고 한동의 ‘좌가장’ 세거지를 떠나 애월, 한림, 한경, 근처로 이주한 것은 5세조 휘 한기(漢棄)때이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문학 > 구비문학
생산연도
2015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31
첨부파일
천의 좌자이 묘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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