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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오흥태

분야별정보 > 문학 > 구비문학



- 오흥태는 1700년(숙종 26년) 성산읍 난산리 오전의 아들로 태어나서 글읽기를 즐겨하였으나 과거시험에 실패하여 늘 선비로서 나라를 걱정함

- 영조 4년(1728)에 이인좌(李麟佐), 정희량(鄭希亮) 등이 난을 일으켜 전국이 어수선해지자, 유생 오흥태(吳興泰)는 삼읍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음

- 창의 격문을 정의현 중심으로 삼읍에 돌리고 의병 수백인을 모아서 군량과 무기를 마련하여 출육(出陸)하려 할 즈음에 태풍이 몰아쳐 순풍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음

-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됨에 따라, 출륙을 중단하고 이내 곧 군사를 해산하여 돌려보냈는데 주변에서는 오흥태를 오의사(五義士)라고 부름

- 영조 47년(1771) 대정현 창천에 유배 온 자인 권진응이 오의사의 창의 격문을 읽고 “ 강강불요한 문장의 요지는 참으로 뜻이 격절하다”고 평하여 옮겨 쓰고, 이듬해 귀양살이가 풀리자 가지고 나감

- 정조 18년(1794) 어사 심낙수가 내도하여 오의사의 의거를 듣고 조정에 보고하니 주문(奏聞)으로 이 사실을 안 정조대왕은 그 뜻을 아름답게 여겨, ‘실적이 없으면 정려를 명하지 아니한다’라는 전례를 깨고 의사(義士)로 정려(旌閭)토록 하였음

- 정조 18년(1794) 본현 유림이 정의서당에 의사묘(義士廟)를 세워 철종 원년(1850) 향사하였는데, 그 당시 격문과 정려기 등이 지금까지 전해져 인구에 회자되고 있음

- 정려기(旌閭記)는 어사 심락수(沈樂洙)가 지었고, 의사묘기는 관해(觀海) 이응호(李應鎬)가 지음

유형
사진
학문분야
문학 > 구비문학
생산연도
2015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47
첨부파일
의사 오흥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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