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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_홍화각기 1

분야별정보 > 문학 > 구비문학



1. 홍화각기(弘化閣記) 해제

  

  홍화각을 지은 최해산(崔海山)은 고려말 화약의 발명가, 최무선(崔茂宣)의 아들로 부친의 기술을 전수받아 세종때인 1431년 좌군동지총재로 화포(火炮)와 철우전(鐵羽箭) 등을 제조하여 임금의 아낌을 받았다. 그러나 1433년 3월 파저강(波猪江)의 여진족을 토벌할 때 좌군을 맡아 군기오실(軍機誤失)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그때 마침 제주는 목사 이붕(李鵬)이 임기가 차서 1434년(세종 16) 6월 박안신(朴安臣)이 발령되었으나 처병(妻病)으로 사임하므로 최해산을 외직인 제주목사로 파견하였다. 당시 제주는 잦은 왜구의 침입과 계속되는 가뭄으로 우마적이 출몰하였는데 밀도살자 가족 650명을 평안도 등지로 이주시키고 있었다. 최해산은 1434년 8월에 발령을 받고 10월에 도착하여 난제를 수습하는 중에 관부(官府)가 실화로 불타고 문적이 소진되고 말았다. 이때 예조참의를 지낸 고득종(高得宗)이 제주에 와서 홍화각을 중심으로 206칸이나 되는 관아를 짓는데 토호들의 협조를 얻으며 도왔고, 또 최해산의 요청으로 홍화각기를 짖고 현액을 쓴 것이다.

  고득종은 세종시대 우수한 집현전 문인들이 있었는데도 안평대군의 몽유도원도에 그의 시문이 올라있고, 세종실록에도 시문이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풍채도 뛰어났기에 중국에 두 번, 일본에 한 번 사신으로 발탁되었다.

 

→홍화각기 2에 계속

유형
사진
학문분야
문학 > 구비문학
생산연도
2017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45
첨부파일
홍화각기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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