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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혈_홍화각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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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화각기는 조선조 초기의 문장체로 지어져, 조선중기 이후 성리학적 고삽한 문장체와는 달리, 물 흐르듯 주제를 전개한 아름다운 문장이라고 평할 수 있다. 이 기에서 세종의 제주에 대한 심려를 직접화법으로 표현하고, 최해산의 실화나 치적 및 복구는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홍화각 명칭의 결정에는 직접화법으로 표현하였다. 이 기에서 역사적으로 간파되는 점은 세 가지이다.  

  첫째 206칸이나 되는 자재와 물력을 어떻게 쉽게 마련했는가 하는 점이다. 제주도에는 고려 때에 많은 사찰이 있었고 거기에 많은 전토가 부속되었는데, 조선조가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정책을 쓰면서 사찰과 전토를 국유화하고 병역이 면제되었던 승도들을 귀향시키거나 관노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관부를 짓는데 사찰의 목재와 기와를 가져다 쓸 수 있었으며, 그리고 승려(髡頂:곤정)들을 입번하는 무리들에 끼워 잡부로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 관부를 짓는데 드는 비용은 조선초 초기 불교폐지로 토지개혁을 하여 중앙집권으로 개국공신들에게 충분히 분양할 수 있었듯이, 제주목사도 고려시대 자치권과 기득권을 가졌던 토호들의 권한을 중앙집권에 의해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기에서 <聖主文明之化, 懹柔之德, 風移俗易, 民安土著久矣>라고 하여 풍속을 바꾸고 백성을 편안하게 살아온 지 오래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치권이 아니라 왕권의 확립을 표현한 대목이다.

  셋째, 최목사 자신이 신에 대하여 석가를 받드는 것이 아니라, 신격(神格)에 대해서 경건하였다고 하였다. 신격은 유교적인 신격을 나타내어, 제주에서 행해지는 복을 내리는 다신(多神)을 내세우고 있다. 유교정책의 발로인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외에 관부의 배치와 소방에 대한 세세한 부분에까지 언급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세 가지 항목을 거론하였다.

  결어로 홍화각기는 제주인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고득종이 중앙집권에 의해 관부를 지은 이면을 보여준 명문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高氏宗門會總本部, 『耽羅星主』, 2016년, pp114~115

유형
사진
학문분야
문학 > 구비문학
생산연도
2017
저자명
제주학연구센터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41
첨부파일
홍화각기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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