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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학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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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중서성에 군량과 임금의 부담을 줄여달라고 요청하다(원종 15년,1274년 2월)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2월 갑자에 별장 이인(李仁)을 원에 보내어 중서성에 글을 올려 말하기를「금년 정월 초 2일에 배신(陪臣:왕의 신하) 문하시중 김방경이 성지(省指:중서성 공문)를 가지고 왔는데, 이르기를 대선(大船) 3백척을 전라 탐라 두 곳에서 건조하라 하였고, 또 정월 초 6일에 도착한 홍다구의 문서에서는 그 소요되는 공장(工匠)과 인부(人夫) 및 재목 등의 물건은 배신(陪臣) 허공(許供)·홍록주(洪綠週)에게 분담시켜 각도에 가서 갖추어 놓게 하고 이어 김방경을 보내어 감독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다만 일은 크고 힘은 약하니 능히 해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는 군(軍)과 민(民)이 원래 구별이 없어 함께 부역(赴役)하고 있습니다. 혹시 순월(旬月:달포나 열흘)을 늘이게 된다면 그 농사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힘이 미치는 것들은 감히 다하지 않겠습니까. 정월 15일부터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는데 그 공장(工匠)과 인부가 3만5백명입니다. 한 사람이 하루 세끼니를 계산하여 3개월이면 합계 34,312석 5두를 지급하게 됩니다. 또 정월 19일에 성지(省指)를 받아보니 말하기를 흔도(欣都) 관인이 소관하는 군인 4천5백인이 금주(金州:김해)까지 가는 데 필요한 식량 1,570석과 그 주둔처의 양식과 조선감독 홍다구 총관군 5백인의 양식 85석을 또 부담하라 하였습니다. 또 제주 유수관군(留守官軍)과 우리나라 사졸 1천4백인의 7개월 식량은 이미 지급을 끝내었는데, 합계 2,904석이 됩니다. 그리고 나주에 내려간 후의 월로 활단지(粤魯 闊端志:예비군과 황제 숙위군)의 군량미 8천석과 마료(馬料) 1,325석도 다 저희 나라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였습니다. 또 지원 10년(원종14) 12월에 성지(省指)를 받아보니 제주 백성 10,223인에게도 다 공급하라 하였습니다. 또 요사이 온 군마(軍馬) 요량은 가히 마련할 수 없어서 무릇 관민(官民)에게 수렴한 것이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또 전년에 전함을 만들었고 4월에 대군(大軍)이 탐라에 들어가서 토적(討賊)하여 5월 그믐에 이르러 돌아왔기 때문에, 백성들은 때를 맞추어 경작하지 못하였고, 가을 수확이 없어서 또 관민으로부터 거두었습니다. 애초에 조선공장(造船工匠)과 둔주 경행(屯住勁行:병영을 설치하여 머물거나 길을 따라 행군해 감)하는 군마와 제주 백성들의 양곡을 마련하는 데 부응하는 것만도 합계 4만여석이었습니다. 이어서 그 뒤의 금주·전주·나주의 주둔군과 아울러 제주군민의 식량을 공급하기란 진실로 어렵습니다. 또 성지(省指)를 받아보니 저희 나라로 하여금 봉주(鳳州:봉산) 둔전군에게 매달 부족량 2천47석과 우량(牛糧) 1천1석7두를 대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종전군(種田軍)에게는 그 농우·농기·종자로부터 처음해 가을 식량과 지원 9년(원종13)의 부족량에 이르기까지 이미 일찍이 넉넉히 지급하였습니다. 또 전년의 농사는 일찍이 수해와 충해가 입지 않는데도, 망녕되게 이 말을 칭탁하여 외람되게 성지(省指)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 공급하게 명령한 것을 감히 어기지 못하므로 이와 같이 말을 꾸미어 신달(申達)합니다. 해마다 기한도 없이 공급하라고 명령을 하니 장차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는 참으로 민망합니다. 바라건데 모두 면제하시고 멀리 사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소서.」하였다. (제주문화방송 「속탐라록」, 1994 발췌)
유형
고문헌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451
저자명
정인지 외
소장처
국사편찬위원회
조회
26
Link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detail/kr_027_0040_0020_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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