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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황제가 성실히 외교에 임할 것을 당부하다(우왕 13년,1387년 5월)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원문>

又宣諭聖旨曰, “我前日, 和你說的話, 你記得麽?” 長壽奏, “大剛的聖意, 臣不敢忘了. 只怕仔細的話, 記不全. 這箇都是敎道將去的聖旨, 臣一發領一道錄旨去.” 聖旨, “我的言語, 這里冊兒上都寫着有. 大抵我的話緊則要他至誠. 那里豈無賢人君子? 必知這意也. 你對那宰相每說, 他只是占田土·占奴婢·享富貴快活, 也合尋思敎百姓安寧, 至至誠誠的做些好勾當. 密匝匝的似兀那羅州一帶築起城子, 多造些軍船, 敎倭子害不得便好. 你却沿海三五十里家無人烟耕種, 又說倭子在恁那一箇甚麽海島子裏經年家住也不回去, 恁却近不得他, 這的有甚難處, 着軍船圍了困也, 困殺那廝這等. 都是合做的事, 你說與他. 你是舊是宰相家子孫, 必是聰明, 這等話與我說道者. 昨日爲馬價的事, 差人遼陽去了, 敎看來的馬, 直兩箇段子八箇緜木的, 或不直這个價錢的, 一个个分揀着, 務要與各官送馬來的家人回去, 耽羅我也想敎些船去, 不要一時抛在那里, 只離那里二十或三十里往來周回, 搶着逐一箇抛者, 買了便回來. 我又尋思不便當, 恐又生出事來, 不免又動刀兵, 以此不買去了. 原朝放來的馬, 只恁管, 我不差人. 我要差人時一頭得了, 大都便差人管去了, 大槩人不才的多. 若差一箇不才的人到那里, 那廝倚著朝廷的勢力, 倚恃著朝廷的兵威, 無所不爲, 起來便是激的不好了. 我決然不差人. 却也地面近恁那里, 和羅州廝對著, 從來恁管, 只合恁管.

我常相漢光武時四夷請官, 光武不許, 蓋是光武從小多在軍旅中, 知道許多弊病, 所以不許他. 這是光武識見高處. 後來的君王多差了, 便如高麗也都分爲郡縣, 設置官守, 後頭也是那不才之人, 恃倚朝廷威勢, 做的不好, 都激變了. 却因朝廷事多, 就不暇整理他了. 則今番兀都那雲南, 我本不征伐他, 他却如常生邊釁, 以此無乃何去征他. 調了二十二萬軍馬和餘丁二十七萬, 平定之後, 帶戰亡逃病折了我五萬兵. 一萬里遠接連著吐番一帶, 用熱多軍馬去守, 又無益於中國, 征伐之事蓋出於不得已. 你回去疊疊的說與他, ‘交至誠保守那一方之地, 休要侮我.’ 這中國有甚話說. 若不至誠, 不愛百姓, 生邊釁, 這等所爲呵, 我却難饒你. 我若征你, 不胡亂去, 一程程築起城子來, 慢慢的做也. 你是故家, 我所以對你仔細說, 休忘了, 與他每說道這意思者!”

 

<해제>

() 황제가또 성지(聖旨)를 내리며 이르기를, “내가 이전에 너에게 한 이야기를 너는 기억하는가?”라고 하였다. 설장수(偰長壽)가 대답하기를, “교시의 골자를 제가 감히 잊어버리겠습니까? 다만 자세한 부분까지 완전히 기억하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이것은 모두 폐하가 지시한 명령이므로, 제가 출발할 때에 성지(聖旨)의 내용을 1통의 조서로 작성해서 가지고 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내가 말한 것은 이 책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대개 내가 말한 요지는 그대들이 지극 정성으로 하라는 것이다. 그대들 나라에도 어찌 현인과 군자가 없겠는가? 반드시 내가 말한 뜻을 알 것이다. 그대는 그대 나라 재상들에게 전하라. 고려 재상들은 토지를 점거하고 노비를 점탈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데, 부디 백성들의 안녕도 깊이 생각하면서 지극 정성으로 좋은 일을 행하라. 저 나주(羅州) 일대에는 총총히 성을 쌓고 군함을 많이 만들어 왜구가 침해하지 못하게 하라. 그런데 그대들 해변 30~50리에는 연기가 나는 집이 없고 밭을 가는 사람을 볼 수 없으며, 또 왜구들이 무슨 섬인가를 강점하고 몇 해씩 거주하여 가지 않는데도 당신들은 감히 접근하지도 못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무슨 그리 곤란한 일인가? 군함을 가지고 그 섬을 포위하고왜구들을괴롭게 하라. 괴롭혀서 저들을 죽게 하라. 이런 일들은 그대들이 마땅히 할 일들이니, 그대가 재상들에게 말하라. 그대는 오랜 재상가의 자손이라 반드시 총명할 것이니, 내 말을 그들에게 전하라. 지난날 말 값 때문에 요양(遼陽)으로 사람을 파견하였는데,그대들이가져온 말을 보고 오라고 지시하였다.그 말들 중에는값어치가 비단 2필과 면목(緜木) 8필이 되는 것도 있고 혹 못 되는 것도 있어, 일일이 분간하여 각 관()에서 말을 보낼 때 온 사람들에게 주어 돌려보내도록 할 것이다. 탐라(耽羅)는 나도 그곳에 선박을 보내 한꺼번에 그곳에서 정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탐라에서 20리 혹은 30리 거리를 왕래하고 순환하면서 한 채씩 순차로 정박하면서 말을 구입하여 돌아오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불편한 일이다. 또 사고가 생기면 무력을 동원하지 않을까 염려되어 그곳에서말을사는 것을 그만두었다. 원에서 방목하던 말은 오직 그대들이 관리하라. 나는 사람을 파견하지 않겠다. 내가그곳에사람을 보내게 되면 모든 일에 다 사람을 파견하여 관리하게 될 것인데, 대개 사람들 중에는 옳지 못한 자도 많다. 만약 한 명의 옳지 못한 사람을 파견하여 그곳에 도착하게 되면, 그 자가 조정의 세력과 조정의 군사를 믿고 온갖 짓을 다할 것이며,그렇게 되면좋지 않은 변고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사람들을그곳에파견하지 않을 것이다. 탐라는 지리적으로 그대들 나라와 가깝고, 나주(羅州)와 대치되어 있으며, 이전부터 그대 나라에서 관리해 왔으니, 지금 그대들이 관할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나는 항상 한() 광무제(光武帝) 때에 사방의 오랑캐들이 관직을 요청하자, 광무제가 허락하지 않았는데, 대개 이것은 광무제가 어릴 때부터 종군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병폐가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광무제가 식견이 높았기 때문이다. 후세의 군왕(君王)들이 다들 비슷비슷하여, 고려(高麗) 같은 곳에 모두땅을나누어 군현을 만들고 관리를 파견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 후에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 조정의 위세를 믿고 좋지 않는 행동을 하고 모두 격분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에는조정의 일이 많아서, 그들을 정리할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 저 운남(雲南)으로 말하면, 내가 그들을 정벌하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그들이 항상 변경 분쟁을 일으키므로, 이에 어쩔 수 없이 가서 정벌하였다. 220,000마리의 군마(軍馬)270,000명의 군인을 동원하여 정벌하였는데, 평정한 후에 전사자와 도망병을 합하니 50,000명이나 되었다. 운남은 토번(吐番) 일대와 10,000리의 국경을 접하고 날씨도 매우 덥고 많은 군대를 보내야 지킬 수 있는 곳이므로, 중국에게는 어떤 이익도 없는 곳이었지만, 어쩔 수없이 정벌한 것이었다. 그대는 돌아가서 재상들에게 누누이 지극 정성으로 자신의 땅을 지키고, 나를 능욕하지 말라.’라고 말하라. 우리 중국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만약 성심을 다하지도 않고 백성들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변경에서 분쟁을 일으키면서 우리들이 욕하는 행동을 하면 나도 그대들을 용서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내가 그대들을 정벌해야 한다면, 되는대로 가지는 않고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을 축조해 가면서 천천히 그대들을 쳐들어갈 것이다. 그대는 고가(故家)의 자손이니, 내가 이렇게 당신에게 자세하게 말하여 주는 것이니, 잊지 말고 그들에게 나의 의사를 전달하시오!”라고 하였다.

 


1. 기본 정보

​1) 사료명: 고려사

2) 세부 정보: 열전 권제49

2) 작성 시기: 우왕 13년, 1387년 5월 미상(음)

3) 저자: 정인지 외

 

2. 수집 정보

1) 수집 일자: 2015. 2. 9. 

2) 수집 내용: 사업

3) 수집처: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왼쪽 링크 참조)

 

 

유형
고문헌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451
저자명
정인지 외
소장처
국사편찬위원회
조회
65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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