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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탐라개국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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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현은 전라도 남해 중에 있다. 그 고기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그 주산 북쪽에 구멍이 있어 모흥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그 땅이다.) 맏이를 양을나라 하고, 차를 고을나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라 하였다. 3인은 황량한 곳에서 사냥질을 하며 가죽옷을 입고 육식으로 살았다. 하루는 자색 흙으로 봉한 목함(木函) 하나가 바다에 떠서 동쪽 바닷가에 이르거늘, 가서 열어보니 함 속에 또 돌함이 있고 한 사람의 붉은 띠에 자색옷을 입은 사자가 따라왔다. 돌함을 열어 보니 청의를 입은 처녀 3인과 송아지·망아지·오곡의 씨앗들이 나타났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신입니다. 우리 임금이 이 세 딸을 두셨는데 말씀하시기를 ‘서해 중에 산신(山神) 신자(神者) 3인 탄생하여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니 배필이 없도다’하시고, 이에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고 가라 하였습니다. 부디 배필을 삼으시고 대업을 이루소서!”하고는 사자는 문득 구름을 타고 가 버렸다. 3인은 나이순으로 장가들고 감천(甘泉)과 옥토(沃土)로 나아가 화살을 쏘아 땅을 정하니,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1도라 하고 고을나가 사는 곳은 제2도라 하고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3도라 하였다. 비로소 오곡을 씨 뿌리고 송아지 망아지를 치니 살림이 날로 풍족하여 갔다. 15대손 고후(高厚)와 고청(高淸)에 이르러 형제 3인이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탐진(耽津)에 이르니 때는 신라의 성시(盛時)이다. 이 때 객성(客星)이 남방에 나타나므로 태사(太史)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방인이 내조할 징조입니다.” 하였다. 드디어 신라에 입조하니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장(長)을 ‘성주(星主, 그 별을 움직이게 한 상 때문이다.)’라 하고 차(次)를 ‘왕자(王子, 왕이 청을 사랑하여 무릎 밑까지 오게 하고 친자식 같이 한 까닭에 이름하였다.)’라 칭하고 계(季)를 ‘도내(都內)’라 하였다. 읍호를 탐라라 하였는데 이는 올 때 처음 탐진에 상륙하였기 때문이다. 각각 보개와 의대를 주어 보내었다. 이로부터 자손이 번성하여 공손히 나라를 섬기니 고(高)를 성주로 삼고, 양(良)을 왕자로 삼고, 부(夫)를 도상(徒上)으로 삼았다. 뒤에 양(良)은 양(梁)으로 고쳤다. 또 「삼국유사」 해동 안홍기(安弘記)에 구한(九韓)을 열거하니 탁라(乇羅)가 넷째번에 있다. 백제 문주왕(文周王) 2년에 탐라국 사자가 은솔(恩率)로 제수되고, 동성왕(東城王) 20년에 탐라가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으므로 친정하여 무진주(武珍州:光州)에 이르니 탐라가 이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자 이를 중지하였다. 탐라는 곧 「탐무라」이다. 백제가 이미 망하자 신라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탐라국주 좌평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와서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 21년에 탐라국 태자 고말로(高末老)가 내조하니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작을 내리었다. 숙종 10년에 「탁라(乇羅)」를 고쳐 「탐라군」으로 하였다.


(제주문화방송 「속탐라록 」, 1994 발췌)

유형
고문헌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451
저자명
정인지 외
소장처
국사편찬위원회
조회
234
첨부파일
고려사_탐라개국신화_국역.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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