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윤형갑(尹衡甲)에게 시호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고 통정대부 윤형갑은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절개를 지키고 무오년(1618)에 의리에 나아갔기 때문에 특별히 높은 벼슬을 내려 포장하고 조천(祧遷)하지 말라는 명까지 내렸습니다. 이 사람의 절의(節義)는 위를 계승하고 아래로 전수하여 사람들의 이목에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일찍이 사과(詞科 사부(詞賦)의 과목)에서 이름이 드러나고 명성이 크게 빛났지만 불행히도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울분을 안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의연히 굴하지 않고 강개하여 죽음을 맹세한 높은 충절과 굳은 지조는 이 문충공(李文忠公)과 정 문간공(鄭文簡公) 등 여러 사람에 부끄럽지 않으니 응당 높이 포장(褒獎)하는 방도가 있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 겨를이 없는 것은 흠이 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헌공(景憲公) 송갑조(宋甲祚)가 홀로 서궁(西宮)에 배알하였던 일로 시호를 내리는 특별한 은전을 입었으니 이 사람 또한 차이를 두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