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정문(明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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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관(翼善冠)에 백포(白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 빈양문(賓陽門)을 나가 명정문에 나아가 여에서 내려 어좌(御座)에 올랐다. 백관이 뜰에 들어와 예를 행하고, 일을 아뢸 신하들이 차례로 앞으로 나왔다.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아뢰기를, “전 성천 부사(成川府使) 김재찬(金載瓚)의 장계에 ‘성천의 환곡이 분류(分留)한 것과 합해도 3만 석이 차지 않는데, 응당 먹여야 하는 인구수와 비교하면 풍년에도 이미 배순(排巡)하기가 어려우니 흉년에는 더욱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10년에 한하여 경사(京師)와 순영(巡營)을 막론하고 발매(發賣)에 관한 문제를 본읍의 경우는 거론하지 말아 주소서.’ 하였습니다. 그것이 고을의 폐단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 문제는 꼭 햇수를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폐단을 제거할 때까지는 발매를 허락하지 말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