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제주 목사(濟州牧使) 조우석(趙禹錫)을 파직하고, 은진 현감(恩津縣監) 신영(申韺)을 나처(拿處)하였다.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이조 참판 서호수가 아뢰기를, “제사에 쓰는 희생(犧牲)은 사체(事體)가 얼마나 중대한 것입니까. 그런데 근래에 외읍(外邑)에서 봉진(封進)할 때 잘 가려서 봉입(捧入)하지도 않고 기르는 방법에 있어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습니다. 일전에 제주목에서 봉진한 무술년(1778, 정조2) 가정조(加定條) 흑우(黑牛)를 가지고 말하자면, 체구가 작아 송아지만하고 비쩍 말랐으며, 홍주(洪州), 청산(靑山) 등 다섯 고을에서 나누어 기른 것도 전혀 쓸 만한 것이 없어 예조에 논보(論報)하여 모두 돌려보냈습니다. 전후로 신칙하였는데도 이처럼 태만하게 봉행하니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희생이 수척한 책임은 나누어 기른 각 고을에 있고, 체구가 작은 책임은 봉진한 고을과 도회관(都會官)에게 있습니다. 나누어 기른 해당 다섯 고을의 수령을 우선 엄하게 추고하여 앞으로 잘 하는지 관찰하고, 봉진관인 제주 목사와 도회관인 은진 현감은 반드시 특별한 처분을 내린 뒤에야 차후를 징계할 수 있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여, 그대로 따랐다. 하교하기를, “봉진관은 파직하고, 도회관은 나처하도록 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