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숙(尹塾)을 부교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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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교하기를, “아, 임오년의 의리를 선대왕께 아뢰는 것은 바로 신하로서의 분수와 의리이지만, 나에게 아뢰는 것은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감히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요, 또한 차마 제시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감히 설명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역적이 되고 선대왕께 역적이 되며 경모궁(景慕宮 정조의 생부인 장헌세자(莊獻世子)를 지칭함)께 역적이 되는 것이다. 다시 자세히 유시하려 하니 오장이 찢어지고 목이 메어 길게 말할 수가 없다. 오늘 윤숙이 부망(副望)으로 비의(備擬)된 것을 보고 특별히 낙점하여 내린 것은, 바로 선대왕께서 한광조(韓光肇)의 제문을 직접 지으셨으되 내가 한광계(韓光綮)를 엄히 신문한 뜻이며, 또한 내가 선조께 글을 올리자 선대왕께서 전교하시어 이후 혹 감히 제시하는 자는 역적이라고 하교하신 뜻이다. 이것이 어찌 의리를 밝히고 시비를 바로잡는 하나의 커다란 관건이 아니겠는가. 전조(銓曹)가 이미 사실을 조사하여 의망하였으니, 조정의 마음이 나의 마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어찌 오래도록 당하관의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겠는가. 외방에 있는 옥당을 체차하고, 병조 좌랑 윤숙을 부교리에 제수하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