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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여도민(千餘島民)이 난투(亂鬪)한 제주소동사건공판(濟州騷動事件公判)(1927년 11월 14일)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천여도민(千餘島民)이 난투(亂鬪)한 제주소동사건공판(濟州騷動事件公判) 

제주도민과 어부 이백명이 크게 싸와 

사상자가 만히 생긴 성산포(城山浦)사건 공판 

전남초유(全南初有)의 대재판(大裁判)

지난 오월 십륙일에 제주도 성산포(濟州島 城山浦)에 잇는 중앙청년회(中央靑年會) 주최로 각희대회(脚戲大會)가 열렷섯는데 맛침 귿아시 성산포에 뎡박(定舶)중이던 어선선부 이백여명이 상륙하야 전긔 씨름판에 갓섯다가 사소한일로 말성이 되야 선부 이백여명과 도민(島民) 천여명의 사이에 충돌이 생기여 형세가 험악하엿슴으로 성산포주재소에서는 제주경찰서에 뎐화로 응원을 청하여다가 겨우 진압은 하엿스나 그때에 충돌로 인하야 중경상자가 도민측은 아홉명 어부측은 열여덜명이나고 또 어부중에는 일본사람은 웅전원상조(熊田原常造)(四八)와 조선인 김명선(金明善)(二二)의 두명이 마저 죽엇슴으로 경찰은 쌍방에서 백여명의 혐의지를 검속하여 목포디방법원으로 넘겨 석달동안 에심중에 잇다가 지난 팔월이십일에 도민측으로 청년회당 고은삼(高殷三)의 사십오명과 어부측으로 박몽주(朴夢株)외 세사람을 합하야 오십명이 광주로 넘어오고 그 남어지는 면소되엿섯는데 광주디방법원에서는 이 사건을 위하야 새로히 큰 법뎡을 건축중이더니 근자에 준공되엿슴으로 지난 십일일 오전열시반부터 소요급상해(騷擾及 傷害) 상해치사(傷害致死)라는 죄명으로 공판이 열리게 되엿던것인데 광주로서는 처음보는 큰 공판이엿다

별항 보도한 바의 성산포사건(城山浦事件)의 공판을 지난 십일일 오전 열시반부터 광주디방법원에 열시반에 금자(金子)재판댱과 문(文), 안전(安田) 두배석의 립회판사가 렬석하고 횡뎐(橫田)검사로 열리엇는데 멀리 제주도에서 온 십여명을 비롯하야 법뎡이 여지가 업시 혼잡하엿다 횡전검사로부터 공소사실을 량독한 후 재판장은 피고 박몽주(朴夢株)로부터 사실심리를 시작하야 오후네시사십분까지에 삼십륙명을 취조하고 휴뎡(休廷)하엿다가 십이일 오전열한시부터 전일에 게속하야 남어잇는 열네명에 대한 취조를 맛치엇는데 오십명피고가 대개는 경찰의 조서(調書)나 예심서를 부인하엿스며 변호사들로부터 증인신청(證人申請)을 하엿스나 모도 긔각되엿는데 이회공판은 오는 십팔일에 개뎡하겟다고 선한언후 오후 두시에 페뎡하엿다더라(광주)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27-11-14
저자명
동아일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16
첨부파일
377. 천여도민(千餘島民)이 난투(亂鬪)한 제주소동사건공판(濟州騷動事件公判)(1927년 11월 14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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