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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국기행(水國紀行)(사(四)): 산무도적(山武盜賊), 도불습유(道不拾遺) 황혼(黃昏)되면 우마방목(牛馬放牧)(1935년 08월 04일) 2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산지포구(山地浦口) 여관으로 돌아온 것은 한시, 간단한 오찬을 마치고 자동차를 달리어 삼사석비(三射石碑)를 찾앗다. 이 삼사석비는 탐라국의 시조 고을나 부을나, 양을나 세분이 서로 도읍을 다투다가 이 삼사석비가 선 곳에서 활을 쏘아 자긔의 화살이 떠러진 곳에 자긔의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활을 쏜 바로 그 지점이라 한다. 삼사석비를 지나니 왼편에는 바다요, 오른편에는 펀한 평야다.

사긔(史記)에 의한다면 피란 다니든 몽고족(蒙古族)이 제주도에 와서 영주(永住)하게 된 일이 잇다고 한다. 그래 그럼인지 제주도 농민들의 밭갈이 광경은 그게 통이 몽고족과 같은 데가 만타.

수십필의 말을 몰아서 조밭 밟이를 하는 것도 일즉이 보지 못한 광경이려니와 고삐도 없는 말의 떼가 편한 들판을 어슬렁 거리는 풍경은 제주도 아니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해가 어스름만 하여도 마소(馬牛)를 오양 속에 가두고 대문을 첩첩히 닫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농촌이오 세게 각국의 풍속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농민들은 이와 꼭 반대다. 해가 질 무렴이면 마소를 집에서 몰아 들과 산으로 내보낸다. 들이나 산에 가서 자고 해뜨거던 다시 들어오라는 것이다. 호박닢 한나를 가지고도 네것이니 내것이니 싸우는 것이 세상의 상태거늘 마소에 굴레도 안씨우고 고삐도 매지 안흔 나라가 어디 잇을 것인가? 물론 이것은 이십사(二十四)만의 도민 중에 거지는 또 한사람도 없다는 제주도민들의 생활안정에서 온 미풍(美風)이겟지 마는 그 천성이 그만큼 아름답지 못하다면 이때껏 말목에 고삐가 매어지지 안 핫을리가 만무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니 이 섬의 사람들이 다시 한번 쳐다보인다. 차안에 가치 탄 진, 김, 이 세분과 운전수까지가 갑자기 나를 조소하는 듯하여 ○○○ 창밖으로 도리켯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5-08-04
저자명
동아일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5
첨부파일
614.수국기행(水國紀行)(사(四)) 산무도적(山武盜賊), 도불습유(道不拾遺) 황혼(黃昏)되면 우마방목(牛馬放牧)(1935년 08월 04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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