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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종횡관(濟州島縱橫觀) (三):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사회(社會)(1937년 08월 29일) 3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섬이면서도 대륙적(大陸的)인 이사회(社會)는 그들에게 농목(農牧)과 어업(漁業)의 생업(生業)을 강요(强要)하엿다. 그러나 이러한것도 지질풍우(地質風雨)에 의(依)하야 원시적제약(原始的制約)을 받고 잇나니 농목(農牧)에 잇어서는 면적(面積)이 확대(擴大)하고 우량(雨量)과 기후(氣候)가 양호(良好)함에도 불구(不拘)하고 지질(地質)의 척박(瘠薄)과 관개수(灌漑水), 음료수(飮料水)의 결핍(缺乏), 풍세(風勢)의 태강(太强)으로 

“어업(漁業)”에 잇어서는 사면해양(四面海洋)이되 양항(良港)의 결핍(缺乏), 계절풍(季節風), 태풍등(颱風等)으로 극(極)히 열악(劣惡)한 조건(條件)을 가지고 잇다.

지질(地質)로말하면 이섬은 전체(全體)로 원래(元來) 화산(火山)이엿든 관계상(關係上) 전도지하(全島地下)에 용암(熔岩)이 첩적(疊積)되여잇을뿐아니라 전면적(全面的)으로 돌밭을 일우고 잇다고하여도 과언(過言)이아니다 제주(濟州)에는 삼다(三多)또는 사다(四多)라는 말이 잇다 (석다(石多), 풍다(風多), 마다(馬多), 여다(女多))해안지대(海岸地帶)고 초생(草生)지대(地帶)고 할것없이 돌담은 이곳의 명물(名物)이다 인적(人跡)이간곳, 돌담없는곳은 없나니우리육지인(陸地人)의 안목(眼目)으로서는 이것은 자기(自己)의 집, 자이(自已)의 밭(전(田))자이(自已)의 평원(平原)을 둘러싸어노은 한 개(個)의 사유(私有)를 표시(表示)하는 경계선(境界線)으로만 보여지는 것이다 기실(其實)그러한 것이 아니고 사실(事實)은 

“경지(耕地)”를 개간(開墾)할 평원(平原)을 방목(放牧)에 이용(利用)하고 교통로(交通路)를 만들기 위(爲)하야서 전면적(全面的)으로 널여잇는 돌덩이를 모아서 싸어노흔것이며 동시(同時)에 그것은 역시(亦是)이곳의 삼다(三多를)를 형성(形成)하는 바람(풍(風))과 말(마(馬))의 침입(侵入)을 막기 위(爲)한 것이다.

이러한 삼다(三多)의 삼위일체(三位一體)인 돌담이 경작지(耕作地)나 주택(住宅)의 주위(周圍)에서 경계선(境界線)의 의미(意味)를 가지게된 것은 그다지 머지안흔 옛날의일이라고하겟다. 어쨌든 이러한 돌담의 거리(距離)가 연장수만리(延長數萬里)에 달(達)한다고하니 얼마나 토박(土薄)하고 바람이 강(强)함을 알수잇는 동시(同時)에 이러한 자연(自然)에 대(對)한 그들의 개척투쟁(開拓斗爭)의 역사(歷史)가 역력(歷歷)히보여진다.

​4에 계속​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7-08-29
저자명
동아일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13
첨부파일
668.제주도종횡관(濟州島縱橫觀) (三)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사회(社會)(1937년 08월 29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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