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제주학 아카이브

제주학연구센터에서 수집한 소장자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종횡관(濟州島縱橫觀) 십(十): 대륙성(大陸性)과 소박성(素朴性) 하(下)(1937년 09월 07일) 3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헐 수 없이 거름을 옴기어 계란(鷄卵)파는 부녀(婦女)의 곁에로 갓다. 한 개(個)의 값을 물엇을 때, 그는 “사꾸과?”하는 소리를 친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무슨책망(責望)을 들은듯머-0 섯노라니 곁에 섯든 “노파(老婆)”가 그것을 친절(親切)히 통역(通譯)하여준다. 그는 육지(陸地)에 다녀온 듯한 노파(老婆)엇다. “사겟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사겟다고 하는 동시(同時)에 이제야 그들의 태도(態度)를 알엇는 지라.

모든 것을 알러온 일행(一行)이니 달리 생각말고 이야기하여 달라고하엿드니 그제야 그들은 우슴으로 대(對)하여준다. 다시 “사겟느냐”는 말을 제주(濟州)말로 하여 달라고 하엿드니 그는 벌서 숨김없는 “사투리”로 “사꾸과 햇줍지기”하며 흔연(欣然)히 아모런 의아(疑訝)없이 우리와 같이 우서댄다.

우리는 “닭새기”(독색기 혹(或)은 던색기로 들렷다 계란(鷄卵)이라는 말이다)를 사가지고 돌아온 일이 잇으니 그가 위선(爲先)“사겟느냐”고 문책(問責)하든 태도(態度)와 다음 순간 흔연(瞬間欣然)히 대(對)하주든 순박(純朴)한 태도(態度)가 다시금 생각된다.

그날 오후(午後) 해녀작업(海女作業)을 구경(求景)하려고 해녀(海女)를 방문(訪問)하엿드니 그들은 재삼재사(再三再四) 촬영(撮影)말라는 설명(說明)이다.

우리는 

“래의(來意)”를 간곡(懇曲)히 말하엿으나 그들은 들은체 만체하고 웨 그대들은 나체(裸體)를 사진(寫眞)에 너어 점두(店頭)에 돌리냐고 문책(問責)할뿐이다. 우리는 다시 견학(見學)의 뜻과 결(決)코촬영(撮影) 안 켯다는 것을 말하고 부두(埠頭)에 나아 갓다. 산지항부두(山地港埠頭)에서 배를 빌려가지고 나아가려는 찰나(刹那)다.

노소 해녀 수십명(老少 海女 數十名)이 한편에 “다왕”을 끼고 한손에 칼을 들고 열(列)을 지어 방파제(防波堤)로 바다를 바라보고 나아가는 장쾌(壯快)한 광경(光景)이보이자 일행(一行)은 한결 같이 그들의 장쾌(壯快)한 행진(行進)에 가슴이 뛰엇든 듯 하다.

이 장쾌(壯快)한 광경(光景)을 영원(永遠)히 기억(記憶)에 남기겟다는 순진(純眞)한 충동(衝動)을 누가 아니 가젓으랴! 가젓단들 그 충동(衝動)을 누가 미워하랴! 무의식중(無意識中)에 그 원경(遠景)이나마“카메라”에 너으려는 듯이 두 사람의 학생(學生)이 손사진기(寫眞機)를 들고 뛰어나섯다. 그것을 멀리서 눈치채인 그들은 “순식(瞬息)”간(間)에 진열(陳列)을 헛처 방파제(防波堤) 저편으로 그림자를 감춘다. ​

→4에 계속​ ​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7-09-07
저자명
동아일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0
첨부파일
675제주도종횡관(濟州島縱橫觀) 십(十) 대륙성(大陸性)과 소박성(素朴性) 하(下)(1937년 09월 07일).jpg

제주학 아카이브에서 창작 및 제공하는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