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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신문기사」제주도 순례(2) (濟州島めぐり(二))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조선신탁 대표이사회장 한상용(朝鮮信託取締役會長 韓相龍) 부녀자는 근면 풍속은 대체로 순박하며 거칠고 촌스럽다. 그러나 배타적관념이 강하며 단결력 있어 매우 의욕적이며 여자는 근면하고 남자는 태만한 것 같다. 길을 걸으면 여자의 활동은 눈이 번쩍 뜨일만해서 시장의 거래도로의 부역 등은 거의 여자여서 남자는 매우 적고 가끔 우마를 부려서 토지를 경작하고 있든지 또는 가정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눈에 뜨인다. 그리고 가정의 경제, 노동의 활동은 물론 여자가 하고 일가의 외교까지 여자가 이것을 담당하고 있다. 남자는 가끔 견피 모자를 쓰고, 이것은 먼 옛날에 몽고풍이 전해져 왔다고 일컬어진다. 동 지역은 여자가 많고, 남자는 적은 까닭에 수명의 첩을 들이고 있는 것은 드물지 않으며 출생은 남자가 많은데도 사망률은 여자보다 16이 많다고 한다. 주민의 수령 대체로 길며 올해 2월 조사에 의하면 100세 이상자 4명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경작지는 1십만 정보 미만이며, 수전 매우 적어 9백 정보에 지나지 않는다. 육답(陸畓) 5천 정보, 그 외 밭 9만 정보이다. 식량은 조, 보리를 싱식으로 하며 쌀밥은 관혼상제와 같은 경우에만 이것을 행한다. 그러나 근래 내지 출가노동자가 귀도하면서 쌀밥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어 쌀 생산은 그 수요에 응하지 못해 이 쌀은 늘 육지로부터 이입하는 것이다. 경작방법은 대륙의 그것과 달라서 파종 후에 우마 1,2필 또는 십 수필을 가지고 이것을 밟아, 그 싹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도민의 말에 의하면 동 지역은 바람이 강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싹이 나지 않는다고, 토색은 대체로 회색 적갈색 갈색인데, 이것은 화산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경작지는 일단 경작 후는 1년 내지 10년 이것을 휴한시킨다. 이것은 비료를 주지 않는 관계도 있지만 본섬사람의 5분의1은 늘 섬 밖으로 출가노동하러 나가서 노동력 부족관계도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휴한지는 전경작지의 3분의 1이다. 도민은 정신 활발 동 섬은 해안 굴곡 매우 적어 어느 항구에 있어서도 배를 대는 것이 매우 나쁘다. 파도 높고 바람강해서 배가 아무튼 1일 내지 수일에 걸쳐서 상륙 불가능한 일이 왕왕 있다. 그러나 읍내인 산지항(도청소재지)의 항내에는 제1계획은 36만원을 투자해서 2백2십 미터, 제2계획은 2십7만원을 투자해서 2백 미터의 방파제를 완성했다. 그 비용은 국고, 지방비 및 주민부담으로 대정6년(1917년)완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방파제 내 물이 얕고 수면이 넓지 않은 까닭에 5백 톤의 선박입항은 불가능하다. 오사카(大阪)방면에서 1천 톤 이상의 큰 배는 빈번하게 기항하는데도 방파제 밖에 정박해서 상륙은 매우 곤란한 것 같다. 방파제 제3계획은 약 2백 미터이며 또한 현안 중인데 그 실행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부는 도내에 고르다. 어느 곳에 있는 집이어도 1년 정도의 식량은 반드시 준비되어 있다. 게다가 근면해서 저축심은 풍부하고 주민은 대체로 영양이 좋고 정신 활발해서 조선육지에 비해서 매우 원기왕성하게 보인다. 또 길을 걸으면 남녀노소 모두 통과하는 우리 자동차를 향해 머리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을 보면 예의를 존중하는 가풍이 보이는 것이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3-06-23
저자명
목포신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9
첨부파일
115_19330623_230(목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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