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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신문기사」제주도 순례(3) (濟州島めぐり(三))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조선신탁 대표이사회장 한상용(朝鮮信託取締役會長 韓相龍) 해녀일 도내의 해녀는 약 1만2천명 있으며 그 중 4천명 내외는 지나(중국)의 관문인 상해, 천진, 내지의 홋카이도(北海道), 규슈(九州), 러시아의 연해주에 까지 출가노동하러 가 있다. 1일 임금은 많아서 3원을 수득하고 있다. 남은 8천명은 도내에 살면서 해녀 작업을 하고 있지만 해녀 조합이 생겨서 거기에 등록하고 있다. 해녀는 10세 내외에서 그 기술을 습득해서 16,7세에서 40세 내외 까지 작업에 종사하는데 섬사람은 결혼할 때 여자의 해녀기술과 같은 뭔가 하나의 조건을 성취하는 것이다. 나는 성산포에서 해녀 작업을 목격했는데 해녀는 맨몸에 사루마타식(허리에서 다리가랑이 쪽을 감싸는 식)의 조선옷으로 일부분 감싸고 안경(수경)을 끼고 큰 통(둥근 표주박과 같은 것)을 가지고 일종의 작은 칼을 손에 묶고 작은 배를 타고 앞바다로 간다. 거기에서 바다로 들어가서 잠시 해저를 내려가서, 암초가 있고 없음을 확인하고 곧 거꾸로 서서 깊은 해저까지 들어가서 전복 등을 채취해 오는 것이다. 바다 속으로 들어가서 대체로 4분정도까지는 참을 수 있는 것 같다. 그 작업은 사계절 늘 이것을 해서 극한 중이라고 해도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어서 이런 것은 조선해녀의 특색이라고 할만하다. 그렇게 해서 임신 중인 해녀라도 분만 직전까지 그 작업을 하고 게다가 문만 후 2주간 될까 말까 해서 다시 그 작업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작한다는 것이다. 해녀의 작업은 극히 교묘해서 그 어떤 실패도 없지만 때에 따라서는 해저에서 해녀가 절취 작업을 할 때 잘못해서 작은 칼이 전복에 걸리고 그 작은 칼은 손에 묶여 있는 관계로 바로 해상으로 나올 수 없어서 실패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는 것이다. 출가임금노동자들 도(島)내 사람은 주로 내지로 출가임금노동을 하러가서, 그 수 4만 명이라고 한다. 즉 주민의 2할이다. 그들은 주로 규슈(九州) 오사카(大阪) 방면으로 출가노동을 가 있는데 오사카가 가장 많고 그리고 그 노동모습은 매우 근면해서 직무를 중시하고 책임감이 강해서 대륙의 노동자보다는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오사카의 모 공장에서는 노동자는 제주도사람만을 사용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있는 곳도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매우 충실하게 일하는 것이다. 자신의 사정으로 귀향할 경우는 반드시 고향에 통지하여 그 대역을 불러들인 후에 자신이 돌아가서 결코 주인의 사업에 피해를 주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늘 저축을 하고 게다가 고향에 많은 송금을 하는 것이다. 그 송금은 1년 중 적었을 때 78만원(우편환) 많을 때는 1백2,3십만원, 그 외에 현금으로 가지고 돌아오는 자 많고 그런 까닭에 도내에는 일본은행 태환권의 산포는 상당한 금액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 정세로 만약 1백만원 씩 돈이 도내로 들어온다고 한다면 1천만원의 돈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제주도의 무역을 보면 1년 3,4십만원 내외의 수입초과여서 이것을 지불한다고 해도 수십만원 내지 수백만원 가까운 돈이 무역외 수입으로서 도내에 들어오는 것이므로 도내장래의 부는 매우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지의 히로시마현(広島県)과 같은 느낌을 가지고 왔던 것이다. 색복은 먼 옛날부터 복장은 남녀 모두 떫은 감을 으깨서 이것을 염료로 해서 옷을 물들이고 있는데 이것은 비를 맞아도 때도 타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3-06-24
저자명
목포신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6
첨부파일
116_19330624_231(목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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