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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신문기사」제주도 순례(6) (濟州島めぐり(六))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조선신탁 대표이사회장 한상용(朝鮮信託取締役會長 韓相龍) 현무동 사혈(蛇穴) 일주 도중에 사막 안의 무인의 땅에 이르면 현무동이 있으며 거기 큰 터널이 있어서 높이 약 30척, 폭 약 20척, 길이 약 2정(町), 천연 석벽의 아치식의 구멍이 있어 ○火의 빛에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공기가 차갑고 곳곳에 천정에서 큰 돌이 붕괴되어 떨어져 길을 막아서고 있다. 여기에는 옛날 큰 뱀이 살아서 도민은 매년 이를 모셨다고 하는 신화와 그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목사 서인(徐仁)이 이것을 사살했다는 일화가 있으며 그 외 5,6개소에 큰 구멍이 있는 것은 옛날 분화의 결과, 용암의 작용이었다고 생각한다. 삼성사단 읍내를 지나 14,5정 남에 있으며 삼성 고(高), 부(夫), 양(良)(양은 지금은 梁으로 새로 고쳤다) 지금부터 3천년 전 삼혈이 있어 삼신인이 나와서 일본에서 온 3녀를 아내로 맞는다. 삼성혈비가 있고 삼성제단석이 있으며 거기에 위폐당이 있고 최근 삼성시조제사 재단을 조직하고 재산 약 56만원을 모아서 이사 3명, 3성의 자손이 춘추 2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거문도 동 섬은 여수군에 속하고 제주도와 여수와의 중간에 위치해서 제주도를 지나 54해리, 여수를 지나 53해리이다. 동 섬은 거문도, 덕촌동도의 3개로 구성되고, 외에 서섬, 내장도, 외장도가 있다. 명치18년(1885년) 영국동양함대가 동 섬을 은거지로 해서 동양을 위협했었다. 8,9천톤급 군함이 항상 4척 정박하고 있었다고 한다. 후에 지나(중국)의 항의(?)로 명치 20년(1887년) 철거했다. 지금도 산 정상에 영국인의 묘가 9개 있다. 항구 입구를 향해 오른쪽 섬은 전에는 무인도였는데 명치38년(1905년) 경 내지의 어업자가 와서 개척을 해서 지금은 상당한 번영을 보이고 있다. 내지인 1백십여호, 선인 가옥 7백6십호 있어서 전적으로 어업에 종사하며 고등어 건착망선이 6십조 있으며 그 외에 1어 통발2개소가 있다. 어획고는 연 3십만원이다. 본섬의 남방파제 1백9십 미터, 북방파제 백 미터의 축조 계획이 있으며 그 비용은 11만원 예정이다. 경작지는 5백 정보인데 수답은 적다. 쌀 조 보리는 이입에 의존하며 제빙공장이 있어서 1일 10톤을 제조하며 어획물의 운송용으로 공급하고 어획물은 내지로 반출한다. 하계는 동남풍이 많고 동계는 동북풍이 많다. 여수 동 지역은 작년에 지나친 곳으로 제주에서 1백십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인구 2만5천명 중, 내지인 3천2백명, 지난번 남조선(南朝鮮)철도의 개통에 의해 급속한 발전을 해서 이제는 무역고, 내지로 이출 5백5십만원, 내지에서 이입 4백5십만원으로 이출초과 백만원이며, 이출의 주된 것은 쌀 1백5십만원, 생선 25만원이며 이입의 주된 것은 기계기구, 석탄, 시멘트, 면사포류 이다. 이것의 무역처는 오사카(大阪), 고베(神戸), 시모노세키(下関) 방면이다. 수산은 연산 7,8십만원이며 동 지역에서는 전남제수회사의 설립으로 각지의 어획물운반이 매우 편리하다. 그래서 수산제조량은 연액 4십만원에 달한다. 서쪽마을인 순천가도에 작은 언덕이 있는데 그 위에 이순신공의 기념비 및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항구의 중앙에 작은 섬이 있어서 이순신공의 옛 전투지가 있으며 또 장군성비가 있다.(사진, 삼성제단)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3-06-27
저자명
목포신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30
첨부파일
119_19330627_234(목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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