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제주학 아카이브

제주학연구센터에서 수집한 소장자료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제하신문기사」칠전팔기 재해에 맞서서 제주면작은 돌진한다 (七轉八起災害に抗し 濟州棉作は驀進す)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 3백만 근의 결승점을 향해서 도민은 오뚝이(生産三百万斤のゴ-ル指して 島民は起上小法師) ‘자연의 위력 앞에서 사람의 힘은 맞설 수 없다’라는 것이 고금의 통례이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매년 태풍의 참해를 입고 있는 제주도의 농민은 작년 이 자연에 맞서는 힘이 부지불식리에 키워져 있다. 면작지 선정이 매우 교묘하게 된 것은 그 가장 비근한 예이다. 태풍이 면에 헤아리기 어렵게 압력을 가한 것도 아닌데 매해 통계에 의해 보면 우선 조와 함께 그 피해율은 특히 심하다. 그렇다고 해서 제주도의 면작은 점차 쇠퇴해 가고 있는가라고 한다면……어째서인지 증해(增害)에 역행해서 면작성적은 나날이 올라가고 있다. 면은 원래가 열대식물이다. 상록의 섬 제주야말로 기후로 봐도 토질로 봐도 가장 적합한 토지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호조건의 혜택을 가지고 있는 제주에 마의 태풍의 내습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해마다 ‘달에 떼구름 꽃에 바람’이 아닌 면에 바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뚝이는 내던져져도 기세 좋게 일어선다. 제주도민은 부딪쳐도 오히려 분기한다. 보라 폭풍피해를 연속 5개년을 받고 섬의 면작전선에 조금의 이상도 없다. 아니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번창해 가는 것은 불굴불의 분기정려, 이 관념은 3성시조의 옛날부터 전통의 피와 함께 전승되어온 것이다. 구전된 신화시대의 옛날 자색옷을 입은 3인의 처녀가 동방 멀리 해가 뜨는 곳(일본)의 신으로부터 파견되어 3성의 시조의 피와 합류해서 오늘날의 번영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도민의 의기를 표징하는 수려, 한라산이 이번 조선 제1의 명승으로 선택된 것도 이 피의 약동의 덕택인 것이다. 태풍의 내습마져 없다면 그 생산 족히 삼백만 근을 초과 할 터. 제주도의 면작은 다행하게도 도(道)가 인정하게 되어 소화9년도부터 면작지도도(島)로 지정되어 다액의 보조금을 교부받고 특히 농후한 지도를 받았던 것이다. 지도당국의 필사의 활동이 눈부셔서 이 상태라면……이라고 기대했는데 천제무정! 첫해는 주의했지만 3번의 폭풍우에 당하고 게다가 개서기에 냉해와 습기로 똑바로 보지 못할 참담한 것이었다. 이어서 2년 째, 2백1십 동 20일의 액일도 무사히 올해만큼은……이라고 의미를 두고 있었는데 시련은 끝까지 깊어서 9월 7일부터 10일에 걸친 태풍은 또다시 가련한 꽃봉오리를 비틀어 뜯어버려 약한 경엽을 꺾어 부러뜨렸던 것이다. 당국의 고심도 농민의 세력도 완전히 수포로 돌아간 것인가 하고 생각되어 일시 망연했지만 다행히도 그 후의 천후순조를 만나 우선 상당한 수확을 얻었다. 제주의 기후이기 때문이다. 매년 이와 같이 천재를 계속적으로 입고 있었는데 도민의 의기는 하늘을 찌르는 분개있어 ‘면으로 손해를 본 것은 면으로 만회한다’라고 유력한 중견농민이 솔선하고 용분해서 오히려 지도당국의 침체한 공기에 일맥의 활기를 불어넣었던 것이다. 한편 오랜 세월 폭풍피해를 받은 적이 있었던 농민무리들은 능숙하게 풍해를 피할 수 있는 토지를 선정해서 면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화11년도는 맥작의 파종 개선이 단행되어 종래의 조방적 농법에서 개방된 것을 기회로 해서 맥간작의 실천에 의해 면작단별의 확장과 폭풍피해의 경감이 기대되어 반드시 면작자에게 복리를 부여할 것이다. 당국이 발표하는 다음 연도의 면작예산 단별은 앞의 기술한바와 같으며 왕좌를...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5-11-14
저자명
목포신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18
첨부파일
188_19351114_508(목포).jpg

제주학 아카이브에서 창작 및 제공하는 저작물은 "공공누리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