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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신문기사」(제주도를 전부 말한다)처녀항해의 ‘황영환’에서[4] ((濟州島をなに語る)處女航海の"晃永丸"で[四])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전설과 해녀가 사는 섬 제주도 시찰여행(傳說と海女住む島 濟州島の視察旅行) 우리는 고천(古川)도사(島司), 강부(岡部)읍장, 추원(萩原)실업협회장 그 외 유지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26일 오전 7시 대흑(大黑)단장을 선두로 상륙했다. 드디어 제주도 시찰이다. ◇ 자동차를 늘어세우고 도청을 방문했다. 이곳 도사는 행정권과 경찰권을 동시에 손에 잡고 있는 것은 좀 특이하다. 이어서 읍사무소에서 경의를 표했다. 사무소는 막 신축한 것으로 읍장은 전에 경남세무과장을 지낸 강부갑자웅(岡部甲子雄) 씨여서 나는 알고 있었다. ‘야~’가 격조의 인사였다. 우리들 직업은 아무리해도 격식 차린 인사를 못해서 그 때도 곤란했어. 루(樓) 위에서 고천(古川) 도사가 제주도에 대해서 강연을 했다. 그 강연이 실로 당당하고 질서정연한 것으로 숙달된 명 강연이었다. 시골에 와서 이런 웅변가를 만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다. 섬의 역사, 지리, 인정, 풍속, 결제 및 장래의 계획 등 그 말을 속기하면 그대로 󰡔제주도 견문기󰡕가 될 정도의 것이었다. 아니 완전히 감동받았다. 그래서 나도 고천(古川) 도사의 강연을 다소 발췌할 것이므로 그렇게 양해를 바라고 싶은 것이다. 강연이 끝나고 부산, 제주도양지역 실업단의 간담회가 시작되었다. 사회는 강부(岡部)읍장이었는데 이 사람이 또 상당한 사람이어서 소탈한 부분이 있어서 고천(古川)에게 내조자인 강부(岡部) 씨는 명 콤비였다. 강부(岡部) 씨는 곧 우리 일행과 합류해서 안내역을 자진해서 맡았고 섬을 일주했다. 제주읍도 고천(古川), 강부(岡部) 양 씨의 명콤비 안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 12시를 지나서 간담회를 끝내고 섬의 시조로 유명한 전설을 갖고 있는 삼성혈에 갔다. 비는 역시 안개처럼 사방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 삼성혈의 전해온 내력을 써보려고 했지만 자네가 또 다른 기회에 제주도에 올 때에 자네의 창작적 상상을 파괴할 것이므로 편지에는 쓰지 않겠네. 그러나 삼성혈 부근의 경치는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 일대는 소나무, 녹나무, 주목, 동백나무 등이 군집되어 숲을 이룬다. 크라이슬러의 길고 긴 참새의 울음소리, 거기에 새가 베이스를 넣은 리듬이 일대를 한층 유수적이고 인상적인 느낌을 준다. 멀리 한라산은 보이지 않지만 그 산의 정상은 멀리 멀리 흐르고 있다. 평화롭고 온아한 비탈, 풍부한 평원에 넓은 녹림이 있으며 작은 언덕이 회상하듯 있다. 이것이 결코 풍부한 비탈을 흐트러트리고 있지 않다. 오히려 표정적인 것이었다. 비 때문에 어린 풀은 선명히 보였다. 서양화다. 유화다. 자네와 둘이서 있었다면 단지 ‘좋구나’ 라는 말만이 있었을 것이다. 그 이상 이 아름다움에서 오는 마음의 동요를 표현하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이 많아서 느낌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라고 자네도 동시에 생각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 일행은 늦은 점심을 여기서 먹고 오후 3시에 여관 석송으로 철수한 사람들은 지금부터 상거래 관계의 순회인데, 나는 비는 오지만 다다미 위에서 오랜만에 밤 코스, 읍의 실업단 주최의 초대연 개최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연회도 팔등신(八尋君やひろきみ)들과 함께 빨리 물러났다. 침대위에서 일기를 쓰고 있자니 역시 오늘 경치가 선명히 머리에 남아 제주도에 와서 좋은 일을 했다고……(근등생(近藤生))※고천(후루카와, 古川)※..
유형
사진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1937-05-08
저자명
부산일보
소장처
제주학연구센터
조회
23
첨부파일
209_19370508_164(부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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