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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의 대일교섭- 『日本書紀』의 교류기록을 중심으로

분야별정보 > 역사 > 제주사일반



耽羅와 日本의 대외교섭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백제멸망 후인 661년 5월 탐라왕자 阿波伎 등이 일본에 貢獻하면서 부터이다. 齊明 5년(659) 일본이 당에 파견한 제4차 遣唐使는 入唐하여 당의 황제를 알현하고 견당사의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당시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정벌을 준비하던 당이 기밀누출방지를 위해 견당사를 유폐하여 귀국하지 못하다 당이 백제를 정복한 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661년 귀국길에 오른 견당사는 조난을 당하여 탐라에 표착하게 되고, 탐라왕자 阿波伎 등과 함께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탐라는 백제의 부흥운동에 참전하였으나 패배하였다. 당시 더욱 긴장이 고조되어 가던 당시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탐라는 일본의 天智朝에 수차례에 걸친 사절파견과 조공을 통한 본격적 교섭을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인궤의 요구에 응해 취리산 맹약의식에 참여하고, 신라・백제・왜와 함께 태산의 封禪儀式에 참여 하는 등 적극적 대외교섭을 통해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대응하였다.

 다이카개신을 통해 고대율령국가를 완성한 일본은 天武・持統朝를 거치며 前朝의 친백제정책에서 친신라정책으로 한반도에 대한 대외정책 방침을 전환하고, 이로 인해 고구려멸망, 나당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당과 30년에 걸친 관계 단절이라는 정책을 고수하지만 동시에 탐라와는 더 적극적으로 교섭을 진행하여, 탐라사의 일본파견과 일본사의 탐라파견을 통한 양국의 교류관계는 지속되었다.

유형
논문
학문분야
역사 > 제주사일반
생산연도
2018
저자명
이유진
소장처
KCI
조회
13
첨부파일
탐라의 대일교섭- 『일본서기』의 교류기록을 중심으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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